위대한 조선전기 4대명필 양사언

단종 즉위 후, 혜빈양씨(惠嬪楊氏)는 단종에게 은밀하게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해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서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방룡 소흥(旁龍所興)의 땅에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1455년 단종의 선위에 의해 세조가 즉위하자 혜빈양씨는 청풍(淸風)으로 유배되고 가산도 적몰됐고, 1455년 11월 9일 대신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상소에 따라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소생으로는 한남군(漢南君) 이어(1429~1459년),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 영풍군(永豊君) 이천(李瑔)이 있다.

1713년(숙종 39)에 혜빈 양씨의 묘를 봉하려 했으나 묘 자리를 잃어버려 정하지 못하고 부조묘(不祧廟)를 명했으며, 1791년(정조 15)에 민정(愍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충청북도 충주시 용관동에 사당이 있다.

한편 시조 양기(楊起)의 아들 양지수(楊之壽)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종2품 품계, 고려 말에는 정2품으로 격상됨)의 품계로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2품 부총리)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녹선됐으며, 손자 양백연(楊伯淵)은 동강 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와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왜구를 격퇴하고 찬성사(贊成事: 고려 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가 되어 정방제조(政房提調: 정방은 고려 때 정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제조는 정2품관이 맡아보는 벼슬)를 겸했다.

증손인 양영수(楊英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령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정3품)와 상장군(上將軍: 정3품)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의 무신(武臣)으로 무예에 뛰어났던 양정(楊汀)은 세조때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양산군(楊山君)에 봉해졌고, 공조판서(工曹判書: 공조는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조(營造)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수부(水府)라고 함. 정2품 장관)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원의 2품)를 거쳐,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양계(兩界)지역의 장관으로 1389년(공양왕1) 종래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이 이름으로 고쳐 대체로 재추(宰樞)로서 이 직을 맡도록 하였음)에 이르렀다.

또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 한석봉)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4대명필(四大名筆)로 일컬어졌던 양사언(楊士彦)은 청주양씨(淸州楊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명종때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병년에 실시하던 과거시험)에 급제해 강릉부사(府使:정3품수령)와 함흥부윤(府尹: 종2품 지방장관)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봉래 양사언(楊士彦 1517∼1584, 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 海客)은 조선조 중기에 한석봉과 함께 같은 시기를 살다 간 명필가이자 선정을 베풀면서 여덟 고을을 다스린 선비이다.

또한 단 한 수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면서도, 읽거나 외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용기를 북돋는 내용으로서 만인에게 회자되는 글이다. 그래서, 봉래 양사언은 명필가이면서 한 수의 시조로서 그 이름이 드높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병과로 급제,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종6품수령), 평창군수(平昌郡守,종4품 수령), 강릉부사(江陵府使, 정3품 수령), 함흥부사, 철원군수, 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安邊)군수로 재임 중 지릉(智陵,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의 능)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했다.

사진은 삼척의 무릉계곡 너럭바위에 남아 있는 옥호거사(玉壺居士) 양사언의 휘호 암각문.‘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의 열 두 글자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마멸이 심해 삼척시에서는 화강암에 모사(模寫)품을 제작해 진품 현장으로부터 약 40m 거리의 길가에 노천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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