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년 당시 '영원토록 봉안' 조성문 등 약탈근거 제시

다각적 전략 통한 상대 압박·국제기구 중재 등 끌어내고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 갖고 침탈 역사 후세에 전해야

일본 국보로 지정, 쓰시마 관음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의 봉안을 위한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봉안 학술발표회’가 금강일보와 서산부석사관세음보살좌상봉안협의회의 주최로 지난 7일 서산시청 대회의실에서 개최되면서 관세음보살좌상 봉안을 위한 서산시민들의 움직임이 구체화 되고 있다.

이날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는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 왜구에게 약탈당했다고 주장하며 관세음보살좌상의 반환 근거를 설명했다.

문 명예교수는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상은 1330년 고려 충선왕 즉위년 즉위일에 부석사 당주로 봉안하기 위해 조성됐다”며 “1370년 전후 서산을 비롯한 서해지역을 5차례 이상 침탈했던 왜구들이 이를 약탈해서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 봉안했다”고 주장했다.

문 명예교수는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 약탈당했다는 증거로 ▲관세음보살좌상 조성문 ▲서산과 대마도 사찰의 무연관성 ▲역사적인 상황 등을 꼽았다,

문 명예교수는 “관세음보살좌상의 조성문에 따르면, 당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좌상을 영원토록 봉안 공양한다’고 기록돼 있는 것은 대마도 관음사에 이안(移安)키 위해 조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며 “또 충청도 서산의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 대마도 관음사와 특별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좌상이 대마도 관음사로 기증된다는 주장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문 명예교수는 “일각에서 조선이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와 교역을 실시했을 때 관세음보살좌상이 정식으로 교역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당시 대마도 측의 교역 요청품목에는 불상이나 불화는 전혀 없었고 조선 측 기증품목에도 이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며 “대장경 판본이나 종 등은 몇 번 요청이 있어서 교역을 한 것이 전부”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당시 1370년 전후 서산을 비롯해 서해안을 약탈하던 왜구가 해안가는 물론 내륙권인 남원이나 개태사까지 침입해 사찰을 불태우고 문화재들을 약탈했던 일이 빈번했다”며 “특히 왜구들이 약탈을 위해 강화도에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관세음보살좌상이 약탈 대상이 됐을 가능성은 높다”고 강조했다.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봉안 학술발표회가 지난 7일 서산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화재 반환의 법적 근거와 반환 전제 조건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허권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이어진 ‘문화재 반환의 국제법적 근거 및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 제문제’라는 발표를 통해 “일본은 고미술품에 대해 폐쇄적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일본 특유의 사회·문화적, 법적제도와 관련된 장벽으로 문화재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일본이 1910~1945년까지 한반도를 지배했을 때 많은 문화재들이 일본 전역으로 흩어졌지만 관세음보살좌상뿐 아니라 일본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들의 반환이 어려운 이유는 한일 간 반환의 법적 해석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일본은 1910년에서 1945년 사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는 지역 간 이동으로 주장하고 있고 한국은 일본의 조선점령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해당 기간 발생한 문화재 이동도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를 비교해볼 때 21세기에는 문화재 반환 사례가 증가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문화재 반환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반환사례를 분석했을 때 타협적인 접근방식이 유효하다”며 ▲반환 문화재에 대한 철저한 연구 ▲문화재 소장기관에 대한 입장 파악 ▲국회·정부·법원 및 국제기구를 통한 반환 ▲시민단체와의 협력 등을 통해 전략적인 접근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허 교수는 “이러한 다각적인 전략을 통해 상대를 압박하거나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의 중재가 진행될 수록 문화재 환수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환수라는 목적을 관철할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 끈기와 인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제공 등이다”라고 강조했다.

김형남 변호사도 ‘문화유산 반환의 전제조건에 대해’라는 발표를 통해 “문화재라는 개념은 물건 자체의 보존에 목적이 있는데 이를 초월해 문화재 보존뿐 아니라 지역주민, 국민, 학술연구자가 이를 활용해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례가 있는 만큼 문화재 향유권이 필요하고 이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며 “또 국가의 문화정책은 문화재의 관리와 운영을 통해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이익과 가치를 높여야 하고 문화재 향수 및 교육기회의 제공을 통해 문화적 욕구를 충족 시키는 등 문화 복지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특히 문화재 반환을 위해서는 문화재와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며 “활용의 목적을 포함하고 문화의 재창조를 강조하면서 국민의 문화 향유권 보호·보장을 위해서라도 문화재뿐 아니라 문화가치가 있는 것까지 포함해 사용해야 하는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부석사와 같은 전통사찰의 경우 정신적, 형식적, 인적, 물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야만 전통사찰이라는 문화유산이 형성되고 이러한 요소들 중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통사찰이라고 볼 여지가 없다”며 “문화재라는 것은 본연의 자리에 존재해야만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백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좌상은 부석사로 돌아와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김 변호사는 “문화유산을 국민들이 향유할 권리를 위해서 전통문화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과 자긍심이 필요하고 침략을 통해 문화재를 빼앗긴 역사를 후세에게 전해져야 한다”며 “하지만 현재 자라나는 세대들의 역사인식과 전통문화 인식은 심히 우려된다”고 한탄했다.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뿐만 아니라 일본 내 있는 고려·조선의 불교문화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등의 주제발표 모습.
이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는 ‘고려말 왜구와 일본 소재 고려의 불교문화재’라는 발표에서 “지난 1998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확인된 불상은 대마도에만 133개나 된다”고 운을 뗀 뒤 “일본 내 문화재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이는 미술학적 연구에 불과했고 이러한 문화재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가게된 것인지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대마도 최남단 다구쓰다마 신사에 소장돼 있는, 현존 최대의 고려 청동제 반자(飯子)와 가라쓰 카가미 신사에 보존돼 있는 고려 수월관음도의 경우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일본학자의 연구밖에 없다”며 “쿠스노이 다카기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불교문화재가 왜구의 약탈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시기는 고려와 일본 간 교섭이 실시됐고 왜구약탈로 단정 짓기에는 사료가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밝히고 있어 일본에 너무 유리한 쪽으로 조사가 실행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 교수는 “1245년 반자 제작 당시 새겨진 글을 해석하면 고려 무신정권 최고 실력자였던 최충헌의 아들인 최이가 자신의 원찰인 선원사를 세웠던 고려 고종 32년(1245년) 5월, 무신정권의 핵심 권력기구인 진양부가 최충헌의 원찰에 사용할 반자를 만들어 바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일본에 반자가 전해진 1357년 10월 18일에 추가로 반자에 새겨진 명문에는 ‘반자를 다구쓰다마 신사에 바친다. 쇼헤이(正平) 12년(1357년) 10월 18일. 오오쿠라 쓰네다네’라는 내용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1357년 10월 18일에 불과 23일 앞서 왜구들이 고려 사찰을 최초로 약탈한 기록이 남아 있고 약탈 대상이 공민왕 대에 가장 격이 높은 사찰이었던 흥천사 침탈이었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왜구들이 반자를 약탈한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또 이 교수는 “고려 수월관음도는 1391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지는데 불교를 국교로 정했던 고려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일본에 건네주진 않았을 것이고 여몽연합군과 일본의 대치 상황이 지속됐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류가 단절돼 왜구의 약탈 말고는 일본으로 건너 간 경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외에도 에니치지라는 절에는 높이 73㎝, 구경 47.5㎝의 고려시대 종이 보존돼 있는 등 많은 불교문화재가 일본에 있어 정확한 연구 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완섭 서산시장과 이철수 서산시의회 의장, 이준호 서산문화원장, 도신 서산시주지협의회 회장, 서산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학술회는 학술발표회와 종합토론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서산=이수홍 기자
내포=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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