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 공명에게 태자를 부탁하다.(2)
독관이 유조를 다 낭독하고 난 후 태자 선이 앞으로 나서서 정중하고 법도에 맞게 몸가짐을 가지고 말하였다.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일호의 차착이 없도록 유념하여 봉행하겠나이다.”
만조백관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맹세했다.
공명은 태자 선의 말을 이어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말하기를
“나라에는 하루라도 인군이 없어서는 아니 된다. 오늘로서 태자 선으로 대통을 이어받게 해야 하오.”
“속히 대위에 나가소서.”
만조백관이 공명의 말에 찬동을 표하여 그날로 태자 선이 등극의 예를 갖추는 대식전을 베풀었다.
연호를 바꾸어 장무 3년을 건무 원년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이때 신황제의 보령은 17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특한 신황제는 선주의 유조를 중히 여기고, 공명의 조언을 따라 착실히 황제의 업무를 수행했다.
태자 선은 등극하고 나서 제갈공명의 거취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무경후로 봉하고 영 익주목을 제수했다.’
건흥 원년 8월 선제의 대례장을 치르고 소렬황제라 시호를 드리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려 모든 감옥을 비워 선제의 유덕을 찬양했다. 선주가 4월에 붕어하고 8월에 대례장을 치르는 동안 천하의 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특히 선제의 죽음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위황제 조비였다. 조비는 촉국이 최상층에 변화가 생기자 참모진을 모두 모아 놓고 노골적으로 침략근성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아린 이빨이 하나 빠져 버린 느낌이다. 현덕이 죽었다 하니 짐은 크나 큰 근심 하나가 사라졌다. 주장이 없는 이때를 놓치지 말고 단숨에 무찔러 버려야 하겠소.”
조비의 이런 야비한 발언에 가후가 나서며 간하기를
“비록 유비 한 사람이 죽었다 하나 제갈양이 곁에서 신제를 돕고 있소. 유비가 죽을 때 반드시 어린 아들을 제갈양에게 부탁했을 것이오. 제갈양은 유비의 은우(恩遇)를 생각하여 마음을 다하고 힘을 쏟아 유비의 유자를 도울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가볍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가후가 그렇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자 가후의 의견에 반대하여 조비에게 아뢰기를
“폐하! 이때를 놓치면 어느 때 출병한단 말입니까?”
좌중의 사람이 바라보니 그는 사마의다. 조비가 사마의의 말에 힘입어 다시 말하기를
“어찌하면 촉을 손아귀에 넣겠소?”
“중원의 군사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다섯 길로 대병을 일으켜 사면을 협공한다면 제갈양이라도 머리와 꼬리를 다 함께 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촉국은 무너질 것입니다.”
“으흠. 5로 대병이라...? 다섯 길로 쳐들어간단 말이지? 어디 설명을 해보오.”
“예, 폐하! 사신을 요동 선비국으로 보내서 국왕 가비능에게 비단과 황금으로 뇌물을 쓰십시오. 그래서 요서 강병 10만을 일으키게 하여 육로로 서평관을 취하게 하는 것이 1로입니다. 2로는 남만에 사신을 보내 만왕 맹획에게 군사 10만을 일으켜 익주, 영창, 장가, 월전 네 고을을 격파하여 서천의 남쪽을 치는 것입니다. 제 3로는 오국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땅을 떼어 주고 손권에게 10만 대병을 일으켜 양천의 혐구를 취하고 부성을 취하는 것입니다. 제 4로는 사자를 항복한 장군 맹달에게 보내어 상용병 10만을 일으켜 서쪽으로 한중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5로는 대장군 조진을 대도독으로 명하고 경조를 경유하여 양평관으로 나가서 서천을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병 50만을 한꺼번에 다섯 길로 나누어 쳐 들어가면 제갈양이 여망의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5로의 대병을 막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조비는 사마의의 말에 크게 고무되어 말 잘하는 사람 넷을 뽑아 사신을 삼아 네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조진을 대도독으로 인사명령을 하고 10만 군을 거느리고 양평관을 취하라했다.
이 시기에 장료를 위시한 옛 장수들은 모두 다 열후에 봉하여 기주, 서주, 청주, 합비 등의 관과 나루, 애구와 성곽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전선과는 별도로 군사행정이 이루어져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때 촉한의 경우는 후주 유선이 즉위한 후로 옛 신하들이 늙고 병들어 죽은 이가 많았다. 하지만 모든 정무를 제갈공명이 전담하므로 질서와 화합이 이루어져서 이릉전쟁의 패전이 아무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제 후주의 짝을 찾는 일이 남아 있었다. 공명은 군신을 거느리고 후주에게 아뢰기를
“돌아가신 거기장군 장비의 따님이 매우 현숙합니다. 올해 17세로 알맞은 나이입니다. 정궁황후로 나무랄 데가 없으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승상이 천거한대로 시행하시오.”
건흥 원년 여름 공명의 청함에 따라 장비의 딸로 황후로 봉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말이 맞은 말인지 이런 경사가 있고 며칠 후, 위의 대군이 5로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이 놀라운 급보는 곧 공명에게 보고되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은 공명이 웬일인지 며칠 째 조정에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경험이 없는 어린 황제 유선은 크게 당황하여 측근에게 명하기를
“공명승상께서 어찌된 일이오? 속히 가서 모셔오시오!”
어명을 받고 승상부로 사자가 달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