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 시·서·화에 능해 '삼절'이라 불러

강희안(姜希顔)은 세종 23년 문과(文科, 문관을 뽑아 쓰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로 나뉨)에 급제하고 집현전(集賢殿, 경연과 서연을 맡아보면서 학문을 연구) 직제학(直提學, 종3품)에 올라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후에 단종 복위에 연루됐으나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參議, 정3품 차관보)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릴 정도로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강맹경(姜孟卿, 1410~1461년, 자는 자장(子章), 시호는 문경(文景))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으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좌의정(정1품), 영의정(정1품)에 이르렀다.

문하찬성사(贊成事, 정2품 부총리)를 지낸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회백(姜淮伯)이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縣事, 창녕군수) 강우덕(姜友德)이며, 어머니는 이혜(李蕙)의 딸이다. 1429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병과를 급제해 의정부 사인(舍人, 정4품 서기관), 백관을 규찰·탄핵하던 사헌부의 집의(執義, 종3품 검사장), 1452년에는 왕의 비서실장인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도승지(都承旨), 1453년 이조참판(參判, 종2품 안전행정부 차관)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수십 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때 수양대군을 도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정2품 장관)에 올랐으며, 좌익공신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강희안 고사관수도.
1458년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 1459년에는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
강희안(姜希顔)의 동생 강희맹(姜希孟, 1424(세종 6)∼1483(성종 14),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강희맹(姜希孟)은 세조 9년(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 정3품)로 진헌부사(進獻副使, 중국의 황제(黃帝)에게 예물(禮物)을 전하기 위해 보내던 사신의 두 번째 서열)가 돼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남경(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재배를 해본 결과 점차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 뒤 수초(水草)가 성(盛)해 못(池)이 폐(廢)해지자 헌종 10년(1844)에 안산군수에 부임한 권용정(權用正)이 이듬해 봄에 하중동의 장정들을 동원해 못을 파냈는데, 여름이 되자 연꽃의 잎이 중국 전당의 것과 같이 두 줄기가 자라난 것이었다. 또 못을 관리하기 위해 하중동 주민 중에서 여섯 명의 연지기(蓮直)을 두고 여섯 명 중 혹 누락자가 생기면 즉시 하중동 주민으로 대체했다. 이들 연지기에는 각종의 노역(勞役), 부역(賦役), 포세(布稅), 양곡세(糧穀稅)를 제외시켜 주고 오직 못만을 관리하도록 했다. 관곡지(官谷池, 조선시대 농학자 강희맹이 중국 난징에서 연꽃 씨를 들여와 전국 최초로 연을 재배한 곳)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 달리 꽃의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담홍색이다. 이 못은 강희맹의 사위인 사헌부 감찰(정6품 검사)인 권만형(權曼衡)의 집가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의 소유로 관리돼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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