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 시·화에 능하고 문장은 당대 으뜸

1797년(정조 21년)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을 행차하는 길에 안산 관아(安山官衙, 안산시 수암동 256)에 유숙할 때 안산관내의 선비를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면서 어제(御題)로 시제(詩題)를 “강희맹이 사신으로 중국 남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당에서 붉은 연꽃씨를 채취해 왔는데. 그로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 이라고 했다”로 정할 만큼 관곡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연당 한가운데에 있던 관상소나무는 관곡지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고 농학자로서의 기품을 상징하고 있는 듯했으나 1990년 9월에 폭우로 고사됐다.

못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인데, 시흥관내의 연성초, 연성중학교 등의 교명과 연성동 동명(洞名) 및 시흥시의 향토문화제인 연성문화제(蓮城文化祭)의 명칭 등은 이 못에서 연유해 명명됐다.

강희맹(姜希孟)은 1477년(세종 29년)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 있을 때 보던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 중추원 부사(副事)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 세자시강원의 정2품)이 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 국방장관) 이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 등을 거쳐, 성종 13년(1483년)에는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하는 종1품 재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강희맹(姜希孟)은 문장이 당대 으뜸이고 글과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박학다식하며 공정한 정치를 편다는 평을 받았다. 유교경전과 역사, 중요한 의례에 밝아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조실록,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의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그가 그린 그림으로 알려진 독조도(獨釣圖)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52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강희맹은 장인 안승효가 준 약 1만㎡의 땅을 근거로 금양(조선시대 시흥의 옛지명)에 와서 살면서 금양잡록이란 농서를 썼다. 금양잡록외 저서에는 사숙재집, 존담해이 등이 있다. 묘(墓)는 부인 안 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가파른 묘역 왼쪽 아래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이 글씨를 썼다. 시흥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강희맹묘역에는 가족, 후손들의 묘와 한글창제 도움비, 문량공 사우, 연성재(蓮城齋)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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