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의 아들 강구손, 우의정 지낸 인물

연산군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강희맹의 아들이다.
강구손(姜龜孫,1451년~1506년, 자는 용휴(用休), 시호는 숙헌(肅憲))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좌찬성(종1품) 강희맹의 아들이다. 문음(門蔭, 공신의 후손이나 궁정의 친척 관계 등 문벌의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되는 일을 이르던 말)으로 군기시(軍器寺,고려와 조선때 병기, 기치, 융장, 집물 따위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의 주부(主簿,정6품주무관)에 제수되고 여러번 옮겨서 돈녕부(敦寧府, 정계에 나갈 수 없는 외척들의 예우를 위한 기관으로 종실의 돈목을 위해 1414년 실제의 직사(職事)가 없는 돈녕부 설치)의 첨정(僉正,종4품 서기관)을 지냈다. 강구손(姜龜孫)은 연산군이 날로 음탕하고 흉포해지자 폐립(廢立,폐위)의 뜻을 품고 있었다. 1479년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있을때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해 사재감정(司宰監,해산물의 조달과 하천의 교통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3품)등을 지냈다.

이어 1485년 상주목사(牧使,정3품수령),승정원의 도승지(都承旨,정3품왕의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세자책봉의 주청사(奏請使,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수시로 보내던 사신)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497년 경기도관찰사(종2품감사)가 되었고,백관을 규찰.탄핵하던 사헌부의 수장으로 종2품 차관급인 대사헌(大司憲,검찰총장)으로 있을때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1498년에 류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일으킨 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을 가볍게 벌하도록 주장하기도 했다.

1500년에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지고,의정부 좌찬성(종1품),1505년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올라 등극사(登極使,새로운 임금의 등극을 중국에 알리러 가던 사신)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평안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강구손(姜龜孫) 묘(墓)는 시흥시 하상동에 있는데, ‘금양잡록’등의 농서를 저술한 농학자인 아버지 강희맹의 재실인 연성재(蓮城齋) 뒷편에 경기도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된 '강희맹묘 및 신도비'를 비롯해 강희맹의 양부 강순덕, 강희맹 형(兄) 강희안, 강희맹 장남 강구손, 손자 강태수 등의 묘(墓)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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