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 정유재란 때 왜군 격토 큰 공
통계공파(通溪公派)에서는 선조때 우의정(右議政: 정1품 정승)을 지낸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 1519~1581년, 자는 상지(尙之), 호(號)는 월포(月浦))과 강사상의 아들로 홍문관의 벼슬 등 청요직을 지내고 지방 수령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된 난곡 강서(姜緖, 자(字)는 면경(冕卿)),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병조판서(判書: 정2품 국방장관)를 거쳐 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1품)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 1543년(중종 38년~1615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1589년 문사랑(問事郎, 죄인의 취조서를 작성하여 읽어 주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조선 시대의 각종 재판은 의금부·형조·한성부·사헌부 및 각급 지방 관아의 상설 형정기관에서 관장했다. 그러나 국가 안위에 관한 반란과 역모 등은 국왕의 친림 추국으로 했는데 이때 실무 담당함)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해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眞興君)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 때는 함경도순찰사(巡察使, 재상급으로서 왕명을 받아 군무(軍務)를 통찰하던 사신)로 활약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를 도와 왜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왕자사부(王子師傅: 왕세자를 교육하던 정1품)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1555~1634년, 자는 인경(仁卿),호는 시암(是庵)),그리고 강담(姜紞)형제가 뛰어났다.
정묘호란(丁卯胡亂,1 627년(인조 5) 후금(後金, 뒤의 청(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으로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음)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은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의 아들이다.
강홍립(姜弘立, 1560(명종 15)~1627(인조 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은 강온(姜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정1품정승) 강사상(姜士尙), 아버지는 참판(參判, 종2품차관)을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 어머니는 정유의(鄭惟義)의 딸이다.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한 후 보던 과거, 또는 무과에 급제)에 병과에 급제했다. 1609년 한성부 우윤(右尹, 종2품 서울시행정부시장) 등을 거치고, 1618년 진녕군(晋寧君)에 봉해졌다.
강홍립(姜弘立)은 1605년 서장관(書狀官,기록관)으로 명에 다녀와 중국의 사정에 비교적 밝았다. 1618년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원병을 요청했을 때,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도원수(五道都元帥, 병권을 도맡았던 장수)가 돼 후금(後金,청)과 교전을 피하다가 거짓으로 투항하기도 했다.
후금에 억류됐다가 정묘호란 때 입국해 조선과 후금의 강화를 주선했으나, 1627년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그해 7월 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의 후손은 고종때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등 판서급(判書級: 정2품 장관) 인물을 배출해서 명성을 떨쳤다. 이 밖에 인조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진주강씨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