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동 명칭, 강서의 호에서 유래

난곡(蘭谷) 강서(姜緖,1538년~1589년)는 1538년(중종 33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에 작고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원경, 호는 난곡이다. 우의정(정1품)과 영중추부사(정1품)에 올라 영의정(정1품)에 추증된 강사상이 그의 아버지이다.
1569년 알성문과(謁聖文科,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한 뒤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正言, 정6품), 홍문관의 수찬(修撰, 정6품 주무관), 홍문관의 부응교(副應敎, 궁중(宮中)의 경서(經書), 사적을 관리(管理)하던 종4품 서기관), 백관을 규찰·탄핵하던 사헌부의 지평(持平, 정5품 검사), 사간원의 사간(司諫, 종3품)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또한 승정원의 좌승지(左承旨, 정3품 당상관), 수원부사(府使, 정3품 수령)를 지냈다. 강서는 정여립이 옥사할 것과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현재의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구 신림동 3동) 주변 난곡(蘭谷)지역은 강서가 태어나기 전에는 낭천리로 불리다가, 강서의 호를 따라 현재까지 난곡(蘭谷)의 명칭으로 40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난곡(蘭谷)의 묘(墓)는 신림3동(난곡동) 선영에 있다.

소제목-달동네의 대명사였던 서울 난곡 지역에 공원이 들어섰다.

서울시는 관악구 난향동 산 105-12 관악산 자락 일대에 전통 정원과 운동 공간으로 이뤄진 ‘난곡공원’을 2009년 11월 완공하고 시민에게 개방했다.
공원이 들어선 지역은 수십 년 동안 주민들의 무단 경작지와 쓰레기 적환장 등으로 이용돼 왔다. 공원 규모는 9394㎡로 8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공원 가장 높은 곳에는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사각정자가 세워졌으며, 주변에 화단과 연못, 전통 정원과 냇물 등이 만들어졌다. 주택가 부근에는 어린이 놀이시설과 운동시설이 설치된 야외 운동장을 만들고 등산로도 정비했다. 시는 특히 공원 주변에 있는 시 유형문화재 정정공 강사상(姜士尙,1519~1581년)의 묘역과 공원의 전통 정원을 연계해 ‘난곡공원역사교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난곡공원과 나란히 위치한 정정공 강사상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4호)은 조선 중기 16세기의 문신 강사상의 신도비와 주변 진주강씨 묘역이 포함된 면적 1만 876㎡의 문화재보호구역이다.
이 지역의 이름도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의 호(난곡)에서 유래했다. 강사상 묘역에는 강홍립 장군도 모셔져 있다.

은열공파에서는 강백년(姜栢年), 강현(姜鋧),강세황(姜世晃)의 3대(代)와 강노(姜人+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때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 정2품 장관), 좌찬성(左贊成: 의정부의 종1품)에 이르렀다.
뒤에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고, 조선 때 총 217명이었던 청백리에 녹선됐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
강백년은 일찍이 부친의 뇌물수수 사건을 겪은 후 젊어서부터 몸을 단정히 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빈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사후인 1695년(숙종 21) 관직 수행 능력이 뛰어나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 덕목을 두루 겸비한 사람에게 주는 청백리에 피선(被選)됐다.

난곡공원 팔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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