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공주 호종하여 원나라 향해 '주자서' 필사해 이듬해에 돌아와

안향은 1289년 11월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扈從, 어가를 뒤따름)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이듬해 돌아왔다. 3월에 부지밀직사사(副密直司事)가 됐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 고려시대 변경의 군사문제를 의논하던 회의기관으로 도평의사사의 전신)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知貢擧, 고려시대의 과거 시험관)가 됐다.

같은 해 12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한 종2품)가 됐고,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 密直司使,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한 종2품)로 승진했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 삼사의 정3품)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僉議參理, 첨의부 도첨의사사의 종2품 벼슬), 세자이보(世子貳保, 동궁관에 소속돼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가 됐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해 그는 집현전(集賢殿)의 태학사(太學士, 2품 대제학) 겸(兼) 참지기무(參知機務), 동경유수(東京留守, 2품지방장관으로 경주시장), 계림부윤(鷄林府尹, 2품 경주시장)이 됐다.

같은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됐다. 이듬해 수국사(修國史, 고려시대 정사의 기록과 사서 편찬 업무를 맡아본 사관의 종2품 관직으로 2품 이상의 재상이 겸직도 했음)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匡靖大夫, 고려 시대 문관 종2품의 품계명이며 문종이 관제를 고칠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라 했다. 충렬왕 원년(1275년)에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찬성사(贊成事, 정2품 부총리)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해 정1품의 삼중대광을 신설한 얼마 뒤 그 위 벽상삼한을 가호해 이뤄졌음)에 이르렀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했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해 이것을 양현고(養賢庫, 고려시대의 장학재단으로 1119년 사학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의 진흥을 위해 설치했음)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같은 해 12월 첨의시랑(僉議侍郎, 정4품 차관), 찬성사(贊成事, 정2품 부총리),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감찰사사(監察司事)가 됐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 국학생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관리들이 품위에 따라 낸 돈)을 마련해 박사(博士)를 둬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1303년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과 이진(李瑱)을 천거해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했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종2품재신)으로 치사(致仕,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했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년)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했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돼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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