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姓氏) 16)경주김씨(慶州金氏) 7

<김경여(金慶餘) 비명(碑銘)-송시열 지음>
인조(仁祖)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벼슬좌(別坐)가 되고 직장(直長, 정7품) 주부(主簿, 6품 주무관)에 전례대로 승진했으며, 외직으로 나가 부여 현감(扶餘縣監, 종6품수령)이 됐다.
정사를 함이 엄정 분명하고 까다롭지 않게 하는데다가 더욱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업무로 삼았다.
그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품복(品服)을 하사했다. 교활한 아전이 겁을 내고 미워해 변고(變故)가 가묘(家廟)에 미친 일이 있어 공이 조사해 법으로 다스리고는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고을 사람들이 비(碑)를 세워 그 은혜를 칭송했다. (그 뒤) 세자익위사(翊衛司)의 익위(翊衛, 세자의 시위를 맡아본 세자익위사의 정5품 관직)로 대과(大科, 문과)에 급제해 예조 정랑(禮曹正郞, 정5품)을 거쳐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에 임명됐다.

당시 오랑캐의 경보(警報)가 자주 이르렀으므로 공이 아뢰기를, “지금은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보는 심정으로 서로 힘써야 마땅한 때인데, 영선(營繕)하는 명이 있으니 빨리 정지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명예를 얻으려 한다고 책망하고 마침내 체직(遞職)시켰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에 소속된 정5품 벼슬로 박사와 더불어 강수의 임무를 맡고 있었음), 세자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를 역임하고,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에 임명됐다.

임금이 장차 효사전(孝思殿)에 친제(親祭)하려고 하자, 동료들이 임금의 병환이 겨우 나은 상태라는 것으로 간(諫)해 정지하게 하려고 하므로, 공은 말하기를, “오래도록 친제(親祭)를 폐했으니 지금은 당장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라고 했다. 공이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 직임에서 떠났다.
이로부터 왕의 잘못을 간언해 바로잡던 사간원의 정언(正言, 정6품 간언관)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정5품 지평(持平).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돼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정6품 관직인 사서(司書), 사간원의 헌납(獻納, 사간원의 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 1원), 문학(文學, 동궁에 소속됐던 정6품∼정5품으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음), 이조정랑(正郞, 문관천거 실무책임자인 청요직의 정5품 전랑),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 5품) 겸(兼) 교서관(校書館)의 교리(校理)로 드나들면서 지제교(知製敎, 왕의 교서를 지어바치는 벼슬)를 겸대(兼帶)했으니, 대체로 한 때의 극진한 선발이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가을에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에게 사명을 받들고 나갔으며, 겨울에 난리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했고, 이듬해인 정축년(丁丑年) 봄에 대가(大駕)를 호종해 도성으로 돌아왔다. 당시 큰 도적은 겨우 물러났지만 국가의 일이 파괴되고 쇠잔해 다시 명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공은 강개(慷慨)해 분개하고 원망하며 마치 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마침내 당시 정승에게 사임하기를,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제공(諸公)이 만약 치욕(恥辱)을 씻을 것을 하늘에 맹세할 의지가 없다면 나는 다시 조정에 설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회덕(懷德)의 향리(鄕里)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고 책을 보면서 근심을 잊고 즐겼다.

조정에서 잇달아 대간(臺諫)의 직임을 내려 불렀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심양(瀋陽)에 가는 서장관(書狀官)에 차임해 오랑캐에게 절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사임해 면직됐으며, 또 금교도 역승(金郊道驛丞) 임명됐는데, 그것은 대체로 오랑캐 차사원(差使員)을 영접하고 전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정에서 굴복시킬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처벌로 본역(本驛)에다 귀양을 보낸 것인데, 공이 어버이를 모시고 귀양살이하면서도 편안하고 여유있게 지내며 또 사양하고 받는 것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면(赦免)돼 돌아오게 되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송애(松崖)’라고 편액(扁額)을 걸고서 말하기를, “소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나중에 시드는 지조(志操)가 있고 낭떠러지는 벽(壁)처럼 서 있는 기상이 있기에 아침 저녁으로 뜻을 부쳐서 스스로 가다듬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무릇 임명하는 명이 있었지만 일체로 사임해 교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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