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 초반 이현동으로 입향

<대전지역 경주김씨 입향>

대전시 대덕구 이현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구 효평동, 서쪽은 장동과 용호동, 남쪽은 장동과 동구 효평동, 북쪽은 갈전동과 접하고 있는 동(洞)이다.

이현동은 뒷산 모양이 둥글넓적한 배(梨)와 같이 생겼다고 해 배산이라 한다. 배산 동쪽 아래 갈밭에서 심곡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배오개라 했는데 이 고개의 이름을 따서 이현(梨峴)이라 했다. 또한 심곡에서 동북쪽 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돌배나무가 많아 배고개라 했다고 한다.

이현동은 이현(梨峴), 심곡(深谷) 2개의 마을로 구별되는데 신탄진에서 동구 직동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대청호를 끼고 있는 마을이 이현이다. 이곳에는 동래정씨가 누대에 걸처 세거하고 있는 동래정씨 집성촌이다. 그리고 도로의 서쪽 마을은 심곡마을로 경주김씨 판윤공파가 주로 세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심곡(深谷, 짚은골)은 고래골 남쪽, 서낭당고개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양달과 음달로 나뉜다. 심곡은 산골 깊숙한 곳에 마을이 있기 때문에 깊은골이라 했고, 이것의 한자표기가 심곡(深谷)이다. 심곡 마을은 세부적으로 양달과 음달 마을로 나뉜다.

양달마을은 심곡 마을 중간의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데 그 북쪽을 양달이라 했다. 심곡 마을에서 햇볕을 많이 받는 쪽의 마을을 양달마을이라 했다. 음달 마을은 양달마을 맞은편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음지쪽에 위치해 있어 햇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에 음달 마을이라 했다.

심곡 마을은 아직도 담이 대부분 돌담으로 돼 있을 만큼 예전의 자연촌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덕구의 자연촌락이라 할 수 있다. 심곡 마을은 경주김씨 판윤공파(判尹, 정2품 서울시장)의 집성촌으로 경주김씨가 약 20호 정도이다.

경주김씨로 이현동의 입향조는 경주김씨 계림군파 11세 김덕음으로 돼 있는데, 그의 묘비를 보면 사망년도가 1636년(인조 14년)이며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해 싸웠다고 돼있어 17세기 전반이라고 한다.

김덕음이 이현동에 입향하기 전에 세거했던 곳은 족보상 김덕음의 선조들의 묘가 충북 청원군 남일면 지역에 있어 그곳에서 세거하다 회덕 이현동으로 입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곡에서 이현 마을로 가는 중간에 경주김씨 재실인 심곡사(深谷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현마을은 이 마을의 뒷산 모양이 둥글넓적한 배(梨)와 같이 생겼다고 해 배산이라 했다.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경주김씨>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김광유가 회덕 송촌동 세거 성씨였던 은진송씨 송남수의 사위가 돼 백달촌(중리동)에 살게 되면서 중리동에 세거하게 됐다. 입향 시기는 김광유의 생년이 1571(선조4년)이었고 몰년이 1596년(선조29년)이기에 16세기 말이다.

김광유의 아들 김경여는 문과에 급제해 인조 때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이었고, 김경여의 증손 김정운은 군수(郡守, 종4품 수령)에 이르렀으며, 김성운은 감사(監司, 종2품 관찰사)를 지내는 등 자손이 번창했다.
이곳은 ‘한촌’이라 해 한때 청주한 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김경여(金慶餘, 1596년∼1653년, 효종 4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이며, 자는 유선(由善), 호는 송애(松厓)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 의정부의 종1품)에 추증된 김광유(金光裕)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宋氏)로 송남수의 딸이다. 인조반정 1등공신 연안리씨 리귀(李貴, 묘소는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의 사위이며,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이다.

1624년(인조 2년) 별좌(別坐, 조선시대 여러 관서의 정, 종5품의 관직)가 됐으며, 그 뒤 직장(直長, 정7품), 주부(主簿, 6품 주무관), 부여현령(縣令, 종5품 수령)을 역임했다.

1632년 세자익위사로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 예조정랑(正郞, 정5품)을 거쳐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지평(持平, 정5품 검사)에 임명됐다. 이때 토목공사의 중지를 청했다가 성균관의 직강, 세자시강원의 사서(司書)에 좌천되기도 했다.

이어 왕의 잘못을 간언해 바로잡던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6품)을 역임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돼 왕을 호종(扈從, 어가를 뒤따름)해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회덕으로 돌아가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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