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천공 김원립과 그의 후손 김근태

갈천공 김원립은 신라 경순왕 29세손이고, 조선 개국공신 계림군 김균의 9세손으로 1590년 8월 2일 출생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자로서의 소양(素養)을 갖췄으며,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자, 홍무적(洪茂績) 등 뜻을 같이하는 여러 선비들과 격렬한 상소를 올려 맞섰다.
이로 인해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하옥당하고 홍무적은 유배됐다. 1623년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임명되고, 1627년 전주정시(全州庭試)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듬해 가주서(假注書)로서,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임금을 수행한 공으로 일자(一資)를 올려 받았다.
1630년 지평이 되고 1635년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받고 헌납이 됐다.이후 장령(검찰청 부장검사), 성균관사예, 직강(直講), 예조좌랑, 예조정랑, 호조정랑,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 조선 때 정3품 아문으로 예절과 의식에 관한 일을 관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외직으로 해운판관(海運判官, 종5품), 부안현감(扶安縣監), 능주목사(綾州牧使, 정3품수령)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조정으로부터 국난 극복을 호소하는 교서가 내려오자, 바로 군사를 모아 북쪽으로 진격해 이듬해 정월에 과천(果川)에 이르러 많은 적병을 죽였다. 1647년 함경도 종성부사(鐘城府使)로 있을 때, 국경 백성들이 몰래 청나라 땅에 사냥하러 들어갔다가 청군에게 붙잡혔다.
굴욕적인 삼전도(三田渡) 항복 이후 청나라의 눈치를 심하게 본 그 즈음의 상황에서, 조정은 할 수 없이 그의 죄를 물어 물러나게 했다. 이후 경기도 용인(龍仁)에 낙향해 제자를 기르며 노후를 보냈다.
지금의 기흥구 신갈동(新葛洞)이 그의 아호 ‘갈천(葛川)’을 따서 ‘갈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과 예조판서(정2품 장관)에 증직됐다.
갈천공 후손이 번성해 기흥구에만 300여 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상갈리에 택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대부분 이주한 상태다.
김원립 아버지는 찰방(종6품) 김성진(金聲振)이다. 처는 정응규(鄭應奎)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에 있으며, 김원립이 병자호란때 활동한 창의비가 세워져 있다. 사후에 예조판서에 추증(追贈)됐다.
경주김씨 갈천공 후손중에는 그의 11세손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석, 김혁(학소)등이 있으며 국회의원을 지낸 김윤식도 그의 후손이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김근태, 김학민과 고려대를 졸업하고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민기, 민선5기 용인시장을 지낸 김학규 등도 갈천공파가 배출한 인물이다.
특히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근태(金槿泰, 1947년 2월 14일~2011년12월 사망)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민주당의 당원이며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 열린 우리당 의장을 역임했다.
1960년대 서울대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해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며 수배와 투옥을 반복해 왔다.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 의해 고문당한걸로 알려져있으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을 용서한 대인이었다. 부인 인재근여사가 2012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