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5) 기계유씨(杞溪兪氏)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 때 경산부(京山府), 약목현(若木縣) 등에 예속됐다.
그 후 선조 때 인동부(仁同府)로 승격되고, 1895년 인동군이 됐으며, 1914년 군이 폐지되고 그 일부 지역은 인동면이 됐다.
인동유씨(仁同兪氏)의 시조 유승단(兪升旦, 1168~1232년, 시호는 문안 文安, 초명은 원순 元淳)은 고려 고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왕명의 출납, 숙위, 군기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3품으로 중추원의 바뀐 이름)를 거쳐 사부(師傅, 왕제자를 교육하던 시강원의 정1품)를 역임하고,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 후의 세계(世系)를 잃게 돼 후손들이 고려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 정4품 차관)을 역임한 유승석(兪承碩)을 중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해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인동유씨(仁同兪氏)는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진 유승단의 후손들이 인동에 세거함에 따라 후대에 유승단을 시조로 받들고 세거지 인동을 관향(貫鄕)으로 삼으면서 생겨났다.
유승석의 동생인 유성렬의 증손 유면(兪勉)이 인동의 이웃 고을 선산 부근 봉황장원장(鳳凰壯元場)에 살았음이 보서(譜書)에 기록돼 있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5세손 유사철은 벼슬이 경상도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 현재의 도지사)에 이르렀다. 9세손 유진(兪鎭)은 조선 성종 때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 정3품 당상관)을 거쳐 경연(經筵,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 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곳), 참찬관(參贊官, 경연청의 정3품으로 부제학이 겸임),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 춘추관에서 시정을 기록하던 정8품 대교를 고친 직제)을 역임해 가문을 빛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인동유씨(仁同兪氏)의 주요 세거지(世居地)는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동이었다.
유승단은 고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그 요속(僚屬)으로 선발됐다가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해 시학(侍學, 고려 때 동궁에 속한 벼슬로 공양왕 2년(1390년)에 보덕(輔德)으로 고쳤으며 3품에서 6품까지 뒀음)이 됐다.
그러나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강종이 강화로 추방되자 그도 배척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희종 때 남경(南京, 서울)의 사록(司錄, 봉록에 관한일을 보던 8품 벼슬), 참군(參軍, 개성부의 정7품 벼슬)이 됐으나 유수(留守, 2품 지방장관) 최정화(崔正華)와의 불화로 사직했다.
고종이 즉위하자 수궁서승(守宮署丞, 행사 때 쓰는 장막(帳幕)을 준비하고 설치하는 일)을 맡았고, 문종 때 영(令)은 2명에 품계는 정8품, 승(丞)은 2명에 정9품이 됐다가 뒤이어 사부가 됐다.
1223년(고종 10년)에 예부시랑(侍郞, 정4품 차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문하성에 속한 정4품 낭사 벼슬)가 됐고, 1227년에 수찬관(修撰官, 사관에 둔 벼슬로 한림원의 정3품 이하의 관원이 겸임)으로서 최보순(崔甫淳), 김양경(金良鏡), 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했으며, 이듬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고려 시대 왕명 출납과 궁중의 숙위 및 군기를 담당했던 추밀원의 정3품 벼슬), 좌, 우산기상시(左, 右散騎常侍,문하부의 정3품)에 올랐고,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 재신)가 됐다.
1232년에 최우(崔瑀)가 재추(宰樞, 재신)를 소집해 강화 천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모두 두려워해 말을 못했으나 다만 유승단만이 ‘종사를 버리고 섬에 숨어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최우는 유승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강화 천도를 결정한 뒤 녹전차(祿轉車) 100여 대로 자기의 가재 도구들을 강화로 옮겼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유승단은 성품이 침착하고 겸손하며 독서의 범위가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특히 고문에 정교해 ‘원순의 문장’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고종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글을 배웠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경사(經史)에도 조예가 깊어 뜻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해 의심이 없게 했으며, 불전(佛典)에도 능통했다.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에 전해지는데 그 중 독락원(獨樂園)은 다음과 같다.
‘동편 언덕에 세상 티끌 하나없고 서편 산기슭엔 돌길이 좁구나. 연못에선 고기들이 즐겁게 춤추고 뜰앞에 길들인 새들은 아니 날아가네. 버들은 봄날 푸른 장막을 치고 꽃들은 한낮에 붉은 옷을 자랑하는 듯. 내가 시를 쓰는 곳에선 수풀과 샘물이 붙잡고 아니 놓아 주노라(東皐塵跡斷 西麓石蹊微 樂沼魚相舞 馴階鳥不飛 柳春張翠幄 花午酒紅衣 喜我題詩處 林泉不放歸)’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 어운산(御雲山)에 있다고 구전돼 왔으며,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540-2번지 임야에 있다. 고려조의 정승 묘라 불리어 도굴돼 비석, 비명, 비갈(碑碣), 상석 등이 없어졌으며, 2개의 문인상 석물만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