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7) 기계유씨(杞溪兪氏)-8

기계유씨는 조선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시대에 황금기를 맞는다.
유척기는 영조 15년 우의정(右議政, 정1품 정승)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이르러 영조(英祖) 중흥사업의 주역이 됐으며, 30년간 노론(老論)집권당의 영수로 군림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종질 유언호 서서 윤노, 조중매 등을 통해 정조시대 노론청류파(老論淸流派)로 이어졌다.

또한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정2품)로 기로소(耆老所, 나이 많은 임금이나 정2품 이상의 70세가 넘은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구 태조3년에 설치함)에 들어가 시문(詩文)으로 문명을 떨쳤던 유언술(兪彦述)도 가문을 증흥시켰다.

유언술(兪彦述, 1703년∼1773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정3품 수령)를 지낸 유명일(兪命一)이고, 아버지는 진사(進士) 유복기(兪復基)이며, 어머니는 김견(金堅)의 딸이다.
1729년(영조 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736년 알성문과(謁聖文科,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하고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 한림에 뽑혀 예문관의 검열(檢閱, 사초를 꾸미던 정9품)이 됐다. 1744년 성균관의 전적(典籍, 정6품)에 제수되고 예조정랑(正郞, 정5품)을 거쳐 언관(言官)으로 활동했다.

사간(司諫, 사간원의 종3품)으로 있을 때 류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이광좌(李光佐) 등을 성토했고, 1749년 동지사(冬至使, 동짓날에 중국에 가던 사신)의 서장관(기록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7년 문과중시(重試, 이미 급제한 사람이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상관 즉 정3품 이상을 줌)에 을과로 급제하고, 1772년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수장 검찰총장)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품)로 치사(벼슬을 사양하고 그만 둠)하고, 기로소(耆老所, 나이가 많은 2품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정식 명칭은 치사 기로소)에 들어갔다.

직간을 잘해 영조에게 인정됐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산수를 좋아해 족숙인 유척기(兪拓基)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력(遊歷)하기도 했다. 저서로 ‘송호집’ 6권을 남겼다.
1787년(정조11년) 우의정(右議政, 정1품 정승)에 올랐던 유언호(兪彦鎬)가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을 거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돈령의 친밀을 꾀하던 관청인 돈령부의 정1품)에 이르렀다.

유언호(兪彦鎬)는 우의정(右議政, 정1품 정승)이 돼 동지사(冬至使, 동짓날에 중국에 가던 사신) 겸 사은사(謝恩使, 중국에 고마움을 전하러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정조 19년에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돈령부에 둔 종1품 관직인 판사로 정원은 1명이고, 위로 정1품 영사 1명이 있음)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유고로 ‘직지간집’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의 교우가 막역해 공(公)의 사후에 유고를 정리해 줬다. 유언호의 묘(墓)는 정경부인(貞敬夫人, 1품 외명부 작호) 여흥 민씨와 합장했으며, 정조의 비문(碑文)을 음각한 묘비가 있다. 상석, 향토석, 망주석, 문인석(文人石)이 배치돼 있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묘(墓)와 묘비.

<유언호 묘(墓)>
유한전(兪漢雋, 1732~1811년),자는 만청 또는 여성, 호는 저암)은 순조 때 100년 이래의 대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1768년(영조 4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문벌로 벼슬에 나가 김포 군수(郡守, 종4품 수령)를 거쳐 형조 참의(參議, 정3품 법무차관보)에 이르렀고, 1811년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의 요속(僚屬, 계급으로 아래인 동료)이 됐다.

일찍이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문장이 숙성하며 약관이 못돼서 문명을 떨쳤고, 중년에 학문이 더욱 진취했으며 영서(穎西) 임학로(任學老) 같은 이도 일찍 홍매산(洪梅山)에게 말하기를, 전 후 100년에 유한전과 같은 문장가가 없었다고 격찬했다.
노년에 더욱 학문을 즐겨 용학(庸學)을 수 천번 읽었으며, 은진송씨 우암(尤菴) 송시열을 특별히 애모했고, 그림이 또한 절문(節文, 적절히 꾸며 훌륭하게 만듬)했다.

서예(書藝)에 능했던 유한지(兪漢芝, 1760~1834년, 자는 덕휘, 호는 기원)는 문인 겸 서예가로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금석문으로 영천의 은해사영파대사비(銀海寺影波大師碑)와 산청의 '문익점 신도비(神道碑)'의 전액(篆額, 전서체)을 썼다.

유한지(兪漢芝)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인물로, 유한준(兪漢雋)의 사촌동생이다. 영춘현감(永春縣監, 종6품 수령)을 지냈으며, 전서와 예서를 잘 써 일대에 이름이 높았다.

신위(申緯)는 경수당집(警修堂集)에서 “청풍군수 윤제홍(尹濟弘)의 산수화와 영춘현감 유한지의 전서, 예서가 한때 뛰어났다”고 했고,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阮堂集)에서 “조윤형(曺允亨)과 유한지는 예서에 조예가 깊었으나 문자기(文字氣)가 적다”라고 평했다.

근역서휘(槿域書彙), 근묵(槿墨) 등에 전하는 그의 진적을 보면, 당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비첩(碑帖)을 본격적으로 익혀 고법(古法)을 충실히 터득했음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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