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통을 입향조로 하는 충남 논산지역 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 유삼재(兪三宰)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 멸망 후 고려왕조에 불복하자 태조(太祖)가 기계호장(杞溪戶長)을 삼았다. 그 후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했다. 기계유씨는 조선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유의신을 파조(派祖)로 하는 동정공파(同正公派), 월성군(月城君) 유승추(兪承樞) 계통인 월성군파(月城君派), 동정(同正) 유진적(兪晉迪) 계통인 장사랑공파(將士郞公派) 등 열다섯 파(派)로 갈라져 있다.

전서공파의 파조(派祖)인 유효통(兪孝通, 자는 행원)은 태종8년 1408년에 식년(式年,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해 세종 때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정3품 수장)과 집현전(集賢殿,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의 직제학(直提學, 종3품 관직)을 지냈다.
유효통은 문장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해, 1433년(세종15년)에 전의감정(典醫監正, 의약품의 관리와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맡았던 전의감의 정3품 관직)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종합적인 향약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했다.
유효통은 여산송씨 정가공파 송전(宋琠)의 사위가 되면서 여산송씨 세거지(世居地)인 연산면 화악리에서 연산천(連山川) 서쪽 연산면 천호리로 입향(入鄕)했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전서공파의 집성촌(集姓村)이 형성돼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 묘표(墓表)>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신독재 김집의 아내로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 유홍의 딸이다.
1592년 김집에게 시집을 왔으나 자식 없이 별세했다. 사후에 김집 묘소는 논산 연산에서 대전방향에 있어 거리도 떨어져 있고 비석도 없었기 때문에, 기계유씨(杞溪兪氏) 묘표(墓表)를 건립했다.
연산역 남쪽에서 국도 1호선을 따라서 서쪽으로 1.5㎞를 가면 남측에 도로가 있다.
여기에서 1.3㎞를 들어가면 광산김씨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고정리 마을에 이른다. 기계유씨(杞溪兪氏) 묘소는 김계휘 신도비의 북동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기계유씨(杞溪兪氏) 묘표(墓表)는 김집 묘표와 같은 철광석으로 돼 있어 표면의 철분이 산화돼 있다.

귀접이 형식으로 다듬었고, 앞면에는 팔분체로 묘표 내용을 새겼으며, 뒷면의 음기도 팔분체로 새겨져 있다. 찬자(撰者, 지은사람)는 송병찬(宋秉瓚)이며, 서자(書者)는 김영화(金永和)이다. 비신의 높이는 81㎝, 폭 58㎝, 두께 18㎝이다. 자경은 앞면 7㎝이고, 음기는 2.4㎝이다.
비(碑)의 앞면에는 ‘증정경부인기계유씨지묘(贈貞敬夫人杞溪兪氏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기계유씨의 가계와 신독재 김집에게 시집 와서 자식이 없었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뒷면 기계유씨(杞溪兪氏)의 묘표는 고려 후기에 나타난 귀접이 규수(圭首)형으로, 논산에선 송문림, 김집, 박증의 묘표와 더불어 기계유씨(杞溪兪氏)의 묘표까지 네 개의 묘표가 규수형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묘비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홍순성 처 기계유씨(杞溪兪氏) 정려각>

홍순성 처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조선 말기 논산지역에 살던 열녀이다. 충청 5현으로 추앙된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유치백이며, 남편은 홍순성(洪淳成)으로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홍순성 처 기계유씨(杞溪兪氏)는 19세에 시집온 지 열 달도 되기 전에 남편이 병사하자, 장례를 마치고 간장 한 사발을 마시고 자결했다. 묘소는 논산시 광석면 항월리에 있다.
1891년(고종 27년) 조정에서 명정(銘旌)이 내려져 논산시 광석면 항월리에 정려가 세워졌다.
정려각은 정측면 한칸으로 맞배지붕의 익공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시멘트 담으로 둘러쳐 보호하고 있다.
정려각 안 명정 현판에는 열녀고사인남양홍순성처유인기계유씨지려상지이십칠년신묘시월일(烈女故士人南陽洪淳成妻孺人杞溪兪氏之閭上之二十七年辛卯十月日)이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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