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과거 시관일 때율곡을 만나는데…

유강(絳)은 중종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으나 순탄치는 못했다. 그는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라 당시 외척 권신인 윤원형을 논핵했다가 여러번 지방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로 축출되고 또 위험한 지경을 넘기기도 했다. 윤원형이 죽은 후 중앙에 복귀해 한성부의 정2품 판윤(判尹, 서울시장), 형조판서(判書, 정2품 법무장관), 호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가 됐다.
유강(絳)은 스스로 30년 입조(入朝)에 한번도 권세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음을 말하면서 이와 같은 몸가짐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겼다.
유홍(泓, 충목공 좌의정)은 명종때 문과(文科)에 급제해 한림(翰林, 종9품 검열 등의 벼슬), 전랑(銓郞, 정6품 이조 좌랑, 정5품 이조정랑), 삼사(三司,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를 거쳐 충청, 전라, 함경, 평안도 등 5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를 역임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判書, 정2품 안전행정부 장관)로서 입상해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 또 광국공신(光國功臣,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역사기록에 잘못 기록된 조선 종실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19명에게 내린 공신)과 평난공신(平難功臣, 조선 선조 23년에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스물두 사람에게 내린 훈호) 등 2등의 공훈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책봉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문에도 능했다.
유홍이 일찍이 과거의 시관이 됐을 때 응시자 중 율곡 이이의 답안이 문과(文科) 소과에서 모두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채점을 한 시관회의에서 모든 시관들이 들고 일어나 이이는 지난날 불문에 들어갔던 과오가 있으므로 장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홍은 “옛날 성현들도 젊은 날의 과오는 모두 있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이의 젊은 날의 일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의 잘못이 더 크다” 고 논박해 마침내 율곡 이이를 장원으로 뽑았다. 유홍은 이만큼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높았다.
유여림(汝霖)의 증손 중에서 유대수(大脩, 문과에 급제후 정4품 장령 등을 지냄), 유대진(大進, 문과에 급제 정3품 참의를 지냄), 유대정(大禎, 문과에 급제 후 종2품 참판), 유대경(大儆 문과에 급제 후 종4품 군수), 유대건(大建 문관에 급제 후 종2품 대사헌) 등이 더욱 출중해 선조 때와 광해군 때에 걸쳐 각각 크게 활약했다.
광해조와 인조조에 걸쳐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 유홍의 손자 유백증(伯曾 이조참판, 충경공)과 호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 유강(兪絳)의 증손 유성증(省曾, 강원도관찰사)이 직간과 충의로 이름을 떨쳤다.
유백증(伯曾)은 광해조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했으나 난정에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인조반정에 참여해 3등공신이 되고 사간(司諫, 사간원의 종3품)에 특배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논핵과 직간은 조정을 진동시켰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어가를 뒤따름)해 협수사로서 대신들의 오국을 통박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그의 척화주장은 청사를 죽이자고 할 정도로 격렬했다.
관이 이조참판(參判,종2품 안전행정부 차관)에 이르고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가증됐다.
유성증(省曾)은 광해조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광해말년에 호조좌랑(佐郞, 정6품 주무관)으로서 이이첨을 공박하는 영남유생들의 소를 대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하옥됐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정5품 지평(持平)이 되고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인 승지(承旨)로 승진, 병자란 때는 강화의 파수대장으로 분전했다. 이어 참의(參議,정3품 차관보), 승정원의 정3품 도승지(都承旨, 왕의 비서실장) 등을 거쳐 관이 강원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 도지사)에 이르렀다.
유성증(省曾)의 두 아들 유황과 유철 그리고 그의 재종질 유계는 인조 11년 같은 해에 모두 문과에 급제 했다.
유황(榥)은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병자호란 때는 정언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해 척화를 주장했다. 또 청이 척화신들을 압송하려고 할 때 이에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척화로 말미암아 단양에 유배되고 관이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유철은 병자호란 때 이조좌랑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그 후 누진해 39세에 경상도 관찰사가 돼 성망이 높았으나 대사간으로 서변옥사에 대해 진언하다가 효종의 진노를 샀다. 현종조에 다시 복관돼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 등을 거쳐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종2품수장인 대사헌(大司憲, 대검찰청 검찰총장)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