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날 묘제 지내는 광주이씨와 영천최씨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 집(李集)선생이다.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 당(李唐)을 실질적인 시조로 받들고 둔촌을 광주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 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기록에 보면 최원도는 고려 말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해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 집(李集) 또한 얼마 후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까봐 매우 걱정이 됐다. 큰 화가 닥쳐 올 것을 감지한 이집은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몇 달 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 날 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해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해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 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옆 짚 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루 밤을 쉬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됐다. 이에 이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해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묻게 되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지킬것을 다짐하였고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된 노비는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게 됐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했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 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돼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죽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줬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광주이씨 시조 이 당(李唐)의 묘(墓)가 있다. 다락방 생활 4년 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돼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 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