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대전민예총 이사장)

지난 11월 18일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죄로 기소하면서 공권력에 의한 학문과 표현의 자유 억압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동부지검의 기소 이후 일본과 미국의 지식인들이 이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국내의 많은 문화예술계 지식인들도 기소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국내·외 지식인들의 비판 성명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며 두 갈래로 나뉜다. 일단 연구자의 저작에 형사책임을 묻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는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공권력에 의한 언론 탄압으로 보면서 검찰의 공소 취하를 요구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고 우려하면서 찬·반 진영의 공개토론을 요구하는 한 흐름이 한·일 양국의 지식인 사회를 가르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가 간행된 건 2013년 8월이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 책의 109곳에서 허위 사실을 적시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민·형사 고소와 책의 판매 금지,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요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건 2014년 6월이었다. 그 후 지난 2월 재판부는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않고 출판해선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동부지검은 보도자료에서 ‘검찰은 유엔 조사자료, 헌법재판소 결정, 미 연방하원 결의문, 일본 ‘고노 담화’ 등 객관적 자료를 통해 박 교수의 책 내용이 허위 사실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흔히 표현의 자유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라는 볼테르의 말로 대변된다. 하지만 볼테르가 말한 관용이 표현의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성적 판단과 인간애에 바탕을 둔 포용력으로 맹신과 불신에서 비롯된 반목과 분쟁을 치유하는 것이지, 사회적 약자나 종교적 신념에 대한 모욕까지 허용하는 건 아니다. 지난 1월 프랑스에서 테러 공격을 당한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경우처럼 무함마드의 누드 만평을 게재해 무슬림들의 신앙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까지 표현의 자유로 옹호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나는 샤를리다’란 구호에 반발해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란 구호가 등장했음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제국의 위안부’ 기소 사건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기소를 할 수 없는 명예훼손죄이기 때문에 검찰의 기소를 비판하기 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식과 처벌의사를 먼저 살피는 게 중요하다. 이는 산케이신문 가토 전 지국장의 명예훼손죄 기소처럼 권력자들이 특권을 지키기 위해 비판적 표현에 형사처벌로 대응하는 명예훼손죄 악용과는 전혀 다르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서 파생된 반인도적 국가폭력이자 전쟁범죄임을 국제사회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의 강제 연행이 아닌 조선인 업자나 포주의 모집에 의한 매춘부이기 때문에 일본은 인신매매를 묵인한 정도의 도의적 책임만 있으며, 그녀들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는 애국적 존재였기에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조정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근거 부족과 심한 논리적 비약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느낄만한 소지가 매우 크다. 위안부 징모 책임을 조선인 업자에게 위임했다 해도 위안소 제도를 관리·통제한 일본군의 책임이 희석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이 동지적 관계였다는 주장의 근거는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 ‘개미의 자유’에 등장하는 조선인 위안부의 의식이다. 이런 소설 속 인물의 의식을 역사적 현실에 대한 해석의 근거로 삼는 것은 허구와 현실을 동일시하는 논리적 비약일 뿐이다. 이는 그의 역사적 피해자에 대한 공감의식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보인다. 동양 최고의 역사가인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 재현한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궁형의 치욕을 겪은 자신의 체험을 승화시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처한 인물과 영혼으로 교감해 그의 삶을 진실에 가깝게 재해석해 냈다. 박 교수가 위안부 문제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제시하며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한 점은 높이 사지만 중요한 점은 피해 당사자들의 납득이 전제돼야 하며, 외교적 타협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하는 정의로운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