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예산 등 4곳에 동상 1972년 대전에 첫 설치
애국 + 체육정신 계승 상징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매헌 윤봉길 의사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은 많이 있지만 매헌 선생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꼽을 때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이처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은 태어난 지역에 해당 인물을 기념하고 뜻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설치한다. 때문에 우리나라 곳곳에는 많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대전에서 열리는 각종 스포츠 경기를 보러 한밭종합운동장에 가보면 충무체육관 앞에 매헌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 한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난 매헌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왜 충무체육관 앞에 위치해 있는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오는 관람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의사의 동상을 보고 있으면 ‘매헌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왜 고향인 충남 예산이 아닌 대전에 있을까?’, ‘다른 장소가 아닌 체육관 앞에 건립됐을까?’ 등의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전 충무체육관 앞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은 1972년 5월 23일 의거 4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것으로 당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이 공동으로 건립한 것이다.
매헌의 동상은 태생지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사당인 ‘충의사’와 천안의 ‘독립기념관’, 서울 양재동의 ‘윤봉길의사 기념관’,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등 전국의 4곳에 세워져 있다.
충의사와 독립기념관,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매헌이 살았던 생가이거나 매헌의 뜻을 기념하는 기념관이지만 충무체육관은 매헌과 이렇다할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연관이 없는 듯 보이지만 충무체육관 앞에 건립된 매헌의 동상은 4개 중 가장 먼저 세워졌고, 그 만한 이유가 있다. 건립된 순서를 보면 충무체육관 앞이 1972년에 설치돼 1호로 기록됐고, 충의사에는 3년 뒤인 1975년에 세워졌다.
이어 1987년 독립기념관, 1992년 윤봉길의사 기념관의 순으로 설치됐다.
매헌의 동상이 대전 충무체육관 앞에 자리잡은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매헌은 의거 1년 전 즈음인 1928년 말경 태생지인 예산 수암산 앞에서 산 이름을 따서 ‘수암체육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매헌이 만든 수암체육회는 친목 운동 단체로 당시의 농민들에게 근대 스포츠를 알리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체육활동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헌은 수암산 밑의 3305㎡(약 1000평)가 넘는 운동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근대스포츠를 즐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충무체육관 앞 매헌의 동상은 당시 건립주최인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충청도가 낳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매헌 윤봉길 의사의 동상을 고향인 충남도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후 충남도가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근대 스포츠가 이뤄지고 있고 체육정신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충남 수부도시인 대전의 한밭운동장을 낙점했다.
당시 충남도는 ‘충남도청’의 소재지인 대전에 동상을 설치하면 많은 이들에게 매헌의 숭고한 뜻을 잘 알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밭운동장을 선택했다.
충무체육관에 설치된 매헌의 동상은 충남 공주 출신인 강태성(84·이화여대 명예교수) 조각가의 작품이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강태성 조각가에게 매헌의 동상 제작을 의뢰했고 강 조각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강태성 조각가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서 대전 충무체육관에 세울 매헌의 동상 제작을 의뢰했었다”며 “충남 출신으로 지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차에 매헌 윤봉길 의사 동상 제작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매헌은 도시락폭탄이 아닌 수통(물통)폭탄을 던졌다?
매헌 윤봉길 의사를 떠올리면 도시락 폭탄을 연상하게 된다. 국민 대다수가 매헌이 도시락폭탄을 던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장에서 윤 의사가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이 아닌 ‘수통(水桶)폭탄’이다.
매헌은 수통모양의 폭탄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준비해 행사에 참가했다. 당시 행사장에서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락을 지참할 수 있도록 해 2개의 폭탄을 도시락으로 위장할 수 있었다.
매헌이 준비한 수통 폭탄은 일본군을 향해 투척하기 위한 것이었고 도시락 폭탄은 투척을 하고 난 뒤 자살용이었다.
당시 행사장은 단상까지 2개의 경계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 1경계선은 5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제 2경계선은 2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제 2경계선에 있던 매헌은 안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수통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매헌은 바닥에 내려 놓았던 도시락 폭탄을 집어 들려는 순간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조카인 윤 주 씨는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고 스피커의 고장으로 인해 ‘삐~’ 소리가 나자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스피커를 쳐다보는 순간 뛰어들어가 폭탄을 투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