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년의 시간 '비포 선라이즈' 3부작

사랑하는 사람과 싸울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나와 같은 생각,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싸우는 일 없이 함께 기쁨과 슬픔을 오랫동안 깊게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만큼 서로 얼마나 대화가 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랑의 필수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 없이는 생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설가 카뮈의 말처럼,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의 ‘비포 3부작’은 셀린과 제시의 20대, 30대, 40대 남녀의 소통방식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기차안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제시와 셀린

# 20대, 한여름밤의 꿈같은...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저 부부, 왜 다투는지 알아요?”

파리로 향하는 유럽횡단 기차 안, 미국인 청년 제시(에단 호크)는 부부싸움으로 시끄러운 독일 커플을 피하려 자리는 옮기는 셀린(줄리 델피)에게 말을 건넨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는 고음을 듣는 능력이, 여자는 저음을 듣는 능력이 떨어진대요”

“서로가 죽이지 말고 함께 늙어가라는 자연의 이치네요”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읽고 있던 책에서부터 사랑, 죽음에 대한 생각, 어떻게 인생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지 등 현재의 관심사까지 이어지게 된다. 서로 다른 환경, 다른 나라에서 자란 두 남녀는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차이’를 메우게 되고 어느덧 풋풋한 사랑으로 물들어 간다.
하지만 빈에서 먼저 내려야 하는 제시는 셀린에게 하루동안 비엔나를 함께 여행하자는 깜짝 제안을 한다.

“10년, 20년이 흘렀다고 치자. 그리고 넌 결혼을 했어. 그런데 결혼생활이 예전만큼 재밌지가 않아. 그래서 남편을 탓하며 네가 옛날에 만난 모든 남자를 떠올리는 거야. 그때 그 남자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거지. 그 남자 중 하나가 바로 나야”

그렇게 그들은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빈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자의 유년기, 가족, 사랑, 죽음, 미래에 대한 가치관 등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아침이 되고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둘은 6개월 뒤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떠나보낸다.
그후 제시는 이날의 경험을 토대로 ‘디스 타임 This Time’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고, 이 소설은 9년 후 이들이 다시 파리에서 만나는 연결고리가 된다.

 

  9년만에 재회한 사랑의 기다림은 이런 모습일까?

# 30대, 타오르는 노을처럼 극적인 재회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9년 후,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된 제시는 파리의 오래된 서점에서 마치 운명처럼 셀린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시간을 앞두고 셀린과 파리 시내를 누비며 대화를 나눈다. 9년 전 제시에겐 삶에 대한 냉소가. 셀린에겐 감성적 사색이 있었지만 이제 제시에겐 안정적 삶이, 셀린에겐 현실의 삶이 자리잡고 있다. 셀린은 더 이상 제시의 유령이야기, 손금보기 같은 미신, 로맨틱한 사랑을 믿지 않고, 제시 또한 겉으로는 성공한 작가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에서 어느새 열정이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파리의 카페, 공원,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며 어긋나는 기억의 조각을 맞추던 이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과거를 비추며 얘기하기 시작한다.

“결혼날짜를 잡고도 네 생각만 했어. 결혼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다 자기 모습을 봤어. 우산을 접으며 빵집에 들어가더군. 브로드웨이 13번가였어”

“그때 난 11번가에 살았어”

진짜 사랑은 늘 엇갈리게 돼 있으며 너무 늦게 만나게 되는 셈이거나 혹은 새롭게 사랑을 만들어 가기에는 이미 지나치게 복잡한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두 사람은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지만 제시는 이미 유부남이며 셀린 또한 관계를 앞으로 좀 더 밀고 나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닫는다.
제시와의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되뇌던 셀린은 결국 흐느끼며 말한다.

“너와 보낸 그날 밤 내 모든걸 쏟아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린 것 같아. 내 심장은 식었어”

 

  20대와 같을수만은 없는 40대의 사랑

# 40대, 낭만은 저물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비포 미드나잇 BeforeMidnight 2013

다시 9년이 흘러 부부가 된 중년의 제시와 셀린. 40대에 접어든 그들은 그리스 남부도시 펠로폰네소스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비포 선셋>에서 다시 사랑을 확인한 제시는 결국 셀린을 선택했고, 셀린은 콘돔없이 한 최초의 섹스로 쌍둥이를 잉태하게 된다. 가족휴가를 보내는 이들은 여전히 틈만 나면 쉬지않고 대화를 나눈다.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완벽하진 않지만 이게 실제야”

하지만 40대의 사랑이 20대 사랑과 같을 수는 없는 법. 이들의 대화는 육아와 직장문제 그리고 급기야 서로의 외도까지 의심하면서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18년전 기차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중년부부처럼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오해하고, 말꼬리를 잡고, 쌓였던 감정을 앙금을 드러내면서. 동화같았던 사랑은 이제 현실이 된 것이다. 완벽하진 않더라고 이게 정말로 실재하는 우리의 삶이란 것을, 어쩌면 진정한 타임머신 작동법은 ‘사랑하는 감정’ 자체임을 알려주듯이.

"잊었나본데, 기차에서 만나 달달한 사랑을 나눈 남정네가 바로 나라고"

제시는 화를 삭이며 바닷가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셀린느에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덧> “우리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지만 잠시만 왔다 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리스 할머니는 제시와 셀린과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에 인생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으니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해준 말은 아니었을까.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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