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 장애 딛고 일어선 라누리 씨, 기록연구사 꿈 키우며 대학생활 즐겨

편견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인식이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이런 탓에 장애를 딛고 일어서더라도 사회 정착은 어렵기만 하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오해와 편견에 맞선 용감한 청춘이 있다. 뇌병변 장애를 딛고 일어선 라누리(21) 양의 이야기다.

라 씨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게 됐다. 그래서 세상 빛을 보고도 한참을 인큐베이터에 갇힌 채 지내야 했다. 보통 장애를 가진 많은 이들은 좌절감에 휩싸인 채 스스로를 감옥 안에 가둬버리지만 그녀는 달랐다. 이를 악물고 더 악착같이 살았다. 그래야만 했다.

라 씨의 모습은 생각보다 밝았다. 대학 2학년인 그녀는 캠퍼스 생활이 꿈만 같다고 좋아했다. 꽃다운 나이, 대학생의 로망이라는 연애 경험도 없고 술도 맘껏 마시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라 씨는 대학 캠퍼스의 하루하루가 너무도 즐겁다며 한참을 웃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라 양은 지금 사학도로의 변신이 한창이다. 그녀의 꿈은 영구기록물이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조사·평가하고 보존·관리하는 기록연구사다. 몸이 불편한 탓에 평소 직업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고민하다 기록연구사가 되기로 맘먹었다. 이를 위해 라 양은 대학을 졸업하면 기록관리대학원에도 진학할 생각이다.

매사 긍정적 성격인 그녀도 잊지 못할 상처가 있다. 중학생 때 수련회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몸도 불편하니 수련회 대신 학교에 나와 자율학습을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다. 라 양은 학교에 남는 걸 거부했다. 학교에 남는 건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들과 다르다는 소리를 가장 싫어하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이 상처는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 인식 개선은 아직 멀었다는 의견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라 양도 그렇다. 그녀가 일 년에 한두 번 장애를 겪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선 미담보단 하소연이 더 많다. 시각이 불편한 친구가 안내견과 함께 버스를 타면 왜 개를 데리고 탔느냐는 비아냥, 청각 때문에 수업 필기가 어려워 노트를 빌리는 친구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까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친구들의 답답한 탄식은 끝나지 않는다.

“장애인의 대한 인식이 바뀌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가 변화에 도전해야 합니다.”

누구나 그렇듯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라 양도 웃음을 멈췄다. 불편한 몸 때문에 부모님을 탓하기도 했을 법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없다. 그동안 그녀의 재활을 위해 들어간 돈만 해도 빌라 두 채 값. 부모님이 어려운 형편에도 재활을 통해 걸을 수 있게 해준 것만 해도 평생 못 갚을 은혜란다.

“제가 장애를 가진 게 부모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잘못이 없는 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그저 최고는 아니라도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부모님께 할 수 있는 효도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업을 위해 일어서기 전 그녀는 자신과 같이 편견을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아픔을 가리려 말고 일부러 움츠러들지도 말라고. 우리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