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부자 '사유담(史遊談)'> 세 자매 이야기 - 계절의 여신 호라이

봄은 누가 데려오는 걸까? 바로 호라이(Horai) 여신들이었다. 올림포스(Olympos)에서 꽃꽂이를 하고 있다는데 따뜻한 입김으로 우리 주변에도 이미 꽃단장이 시작됐다.
바위 틈, 자갈밭, 나무 등걸에서도 자라나게 하는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놀랍더니 알고 보니 호라이 여신들이 밤새 꽃꽂이를 한 것이었다.
따뜻한 바람에 변화하는 봄 풍경을 이렇게 이야기로 풀어놓은 게 제법 그럴싸하다. 호라이 여신들은 아프로디테(Aphrodite)를 단장시키는 역할도 하는데 봄의 꽃과 이슬 보석으로 꾸며드린다고 했다.
세 자매는 제우스(Zeus)와 두 번째 부인 테미스(Themis)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언의 능력을 가진 테미스가 낳은 호라이 여신들은 올림포스를 단장하는 일 외에도 큰 역할이 있었다.
바로 인간사회의 질서를 잡는 일이다. 에우노미아(Eunomia), 디케(Dike), 에이레네(Eirene)라는 이름으로 각각 제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에우노미아는 질서를, 디케는 정의를 담당했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 중 법원 앞 천칭과 칼을 들고 눈을 가리고 있는 여신 디케는 가장 유명한 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의 여신의 역할이 강화됐고 ‘아스트라이아(Astraea)’ 라는 특별 네이밍이 붙기도 했다. 어떤 책에선 테미스 여신이 다시 낳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꽃꽂이 하다가 갑자기 질서와 정의 그리고 평화라니 선뜻 이해가 안 갔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자연의 변화처럼 질서 있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룰대로 정의롭게 산다면 평화가 찾아와 아름다워지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자연은 질서였고 그 질서는 아름다움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던 것을 보면 호라이 여신들은 여전히 성실하다. 이곳저곳 봄단장에 바쁘시다.

두번째 만나는 세 여신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Moirai)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운명의 질과 시간을 결정해주었다. 세 여신은 억울하게도 태어난 순간부터 노인이었다. 클로토(Clotho)는 운명의 실을 뽑아내고 라케시스(Lachesis)는 운명의 실을 감거나 짜며 배당했으며 아트로포스(Atropos)는 운명의 실을 가위로 잘라 삶을 거두는 역할을 했다.
운명을 다루는 일은 제우스도 못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아무래도 혼자는 어려우니 처음부터 셋이서 했던 모양이다. 셋도 쉬운 건 아니지만 하나보다는 아무래도 고민하는 폭이 나았다. 삼권분립, 삼세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거다. 그리스 신화에서 하나로 결론짓기 어려운 부분에선 이렇게 여러 명의 신이 함께 등장한다. 세 여신은 밤의 여신인 닉스(Nix)가 낳았다고도 하는데, 죽음에 관련한 문제라 신들의 모습엔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가득 차 있다.
겨우 노파 손끝에 잘리는 게 운명이라면 인생은 참 허무하다. 막내할머니의 가위가 제발 나의 경우엔 무디길 바라야 할까?
신은 인간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왜냐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꼴 저 꼴 너무 봐서 이제 눈감고 싶은데 신은 죽을 수가 없단다. 영원히 미워하고 영원히 싸워야 한단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오만하지 말고 겸허하게 사랑하며 살라고 가르친건가? 그건 인간에게 주어진 복이라는데 우리는 그 복이 복스럽지 않다. 이 또한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죽은 듯 자야겠다. “이 밤엔 안 끊으시겠죠? 돌아보니 살아야할만큼 잡아둘 건 없는데…아이가 아직 너무 어리군요. 막내할머니”

글·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