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부자 '사유담(史遊談)'> 시시포스의 ‘실존적 부조리’

◆신을 속인 강적 시시포스(Sisyphus)
그리스 꾀돌이 삼인방하면 페롭스, 오디세우스(Odysseus), 시시포스였다. 그들은 약삭빠르고 정의롭지 못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편법과 불법, 폭력, 살인 따위는 애교였다.
하지만 이들은 신기하게도 어떤 신화에서나 인기 주인공들이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더니,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헤쳐나가는 존재감 있는 삼인방은 그리스에선 나름 ‘롤모델’이었다.
이렇게 변화에 제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환경의 도전과 인간의 응전으로 역사를 펼쳐왔다. (이 멋진 말은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었다) 똘똘함을 넘어 야비하고 교활한 시시포스는 코린토스(Corinth)의 왕이 되었다. 왕은 모름지기 백성들을 먹이는 어미이자 아비였기에 코린토스 땅에 생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하필 이 곳엔 마실 물이 없어 살기가 아주 고단했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그렇게 쉽게 영토를 포기할 위인이 아니었다.
강의 신 아소포스(Asopos)의 딸이 제우스(Zeus)에게 납치당하자 강의 신은 딸을 찾느라 미쳐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물이 넘치는 샘을 받는 조건으로 시시포스는 아이기나(Aegina)가 잡혀간 오이노네 섬을 알려줬다.
강의 신은 제우스가 ‘신들의 제왕’인 것을 잊은 채 당장에 오이노네 섬으로 쫓아가는데 귀찮았던 제우스는 간단하게 벼락을 던져 강의 신을 물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 때부터 아소포스 강 바닥엔 석탄이 나온다고 했다. 고자질로 얻은 선물이 지금도 콸콸콸 흐르고 있는 ‘페이레네(Pirene) 샘’이었다. 신기하게 지하 우물도 아니고 외부에서 끌어들인 관계수로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 물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한참 사랑에 빠진 제우스를 밀고한 죄로 시시포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저승사자 타나토스(Thanatos)를 시켜 지하로 끌고 가라고 시킨 것이다. 보통 벌은 줘도 단박에 죽이지는 않는데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번엔 보이는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시시포스는 타나토스를 유인해 골방에 묶어뒀다. 그 때부터 죽어야하는 생명들이 죽지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목이 잘린 닭이 뛰어다니고 숨이 끓어진 노파가 웃으며 일어났다. 토막 낸 생선이 헤엄치고 창 맞은 병사가 다시 싸우는 바람에 전쟁은 끝나지도 않았다. 제우스는 급하게 아레스(Ares)를 시켜 타나토스를 구출하는 작전을 펼쳐야 했다. 시시포스는 강적이었다.

◆시시포스의 돌 굴리기
격노한 제우스는 시시포스를 직접 끌고 가 지하세계에 쳐 넣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시시포스는 이미 대책을 세워뒀다. 부인 메로페(Merope)에게 절대로 자기가 죽더라도 장례를 치루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내는 시키는대로 죽은 남편의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그리스에선 혀 밑에 동전을 넣어 두는 장례식을 해야만 저승의 강을 건널 때 뱃사공 카론(Charon)에게 뱃삯을 지불 할 수 있었다. 시크한 카론은 무임승차 따윈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를 치러주지 않자 시시포스는 각본대로 씩씩대며 하데스(Hades)에게 부탁한다.
“아놔~ 이 놈의 여편네 그새 바람이 난게지? 제가 돌아가서 따끔하게 한 마디하고 바로 오겠습니다.”
그러자 신들 세계에서 왕따였던 하데스는 무시당하는 그 심정을 알았기에 흔쾌히 보내줬다. 사실 부인인 페르세포네(Persephone)조차 겨우 1년에 3개월 감금당한 것처럼 같이 있어줄 뿐 사랑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결혼 생활이기도 했다. 이렇게 집으로 돌아간 기타 누락자는(?) 다시는 저승에 돌아오지 않고 잘 살다가 늙어죽었다. 지하의 제왕 하데스가 풀어주었으니 제우스도 손쓰지 못했던 셈이다.

생(生)과 사(死)를 관장하는 신의 특권을 우습게 만든 시시포스도 역시 인간이라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죽어서는 혹독한 벌을 받았다. 아크로코린토스(Akrokorinthos) 산에서 커다란 바윗돌을 밀어 올려야 했고 다시 반대편으로 떨어지면 또 내려가 밀어 올려야했다. 끝없는 무한반복이었다.
나였다면 배째라고 누웠을 것이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다해보라고 이 짓은 못해먹겠다’고 덤볐을 것이다. 밀고 올라가는 건 하겠는데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진 돌을 주으러 걸어 내려가는 무의미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영원한 노력이 헛일이 돼버리는 그 끔찍한 순간이라니 참담하다. 터덜터덜 내려가서 뻔한 미친 짓을 참고 이어가는 그 마음은 칠흑 같은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월요병에 걸리고 불금에 미쳐버리는 건 어쩌면 하고 있는 일이 행복하지 않은거다. 하지만 살아야 해서, 먹어야 해서, 정규라서, 부모라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돌을 밀어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시시포스였다니…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하기 싫은데도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기현상을 이어가는 인간들의 행동을 ‘존재의 실존적 부조리’라고 말했다. 나도 똑같이 느꼈고 이틀이나 생각했는데 재빠른 까뮈가 먼저 말해버렸다. 아깝다. 엄마가 이래서 부지런하라고 했었지.

글·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