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남대 이하준 교수

친구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

“난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끝까지 솟았어. 아마 너도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마찬가지였을 걸”,

“그래 아마 나도 그럴 것 같아.”

“근데 말이야, 너도 아는 내 친구 XX 있자나. 걔가 그 애 남친 얘기를 하는데 몸에 소름이 돋더라, 끔찍하더라고”

이 대화를 듣는 사람은 금방 눈치를 챘을 것이다. 신체 감각의 변화가 감정을 낳는 직접적인 원인이거나 적어도 매우 상관성이 있구나 하고 말이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 밖의 아테네 철학자들은 대부분은 이성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감각이나 감정은 부수적이고 주변부적인 철학적 주제에 불과했다. 그런데 엠페도클레스나 소피스트들에게 감각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인간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이들의 사유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인 아리스티포스(Aristippus B.C 435~B,C 355)는 선배 철학자들처럼 단순히 감각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각과 감정의 문제를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탐구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hedonism)이다.

아리스티포스는 이집트의 키레네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최초로 돈을 받고 학생을 가르쳤으며 소크라테스에게 돈을 부친적도 있는 인물이다. 그는 소크라테스도 식료품이나 술은 받았다고 강조하며 교육의 대가로 수업료 받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성격이 좋고 사교적이라 많은 친구를 두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태양을 가리지 마소’라고 한 덕과 청빈의 실천을 최고의 삶으로 간주하는 키니코스 학파의 대변인인 디오게네스와도 절친 사이였다. 덕과 청빈을 강조한 디오게네스에게 시실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오스를 찾아가 돈을 얻어내는 아리스토포스는 ‘왕의 개’로 지칭될 만큼 경멸의 대상이었지만 둘은 지속적인 교류를 한 애증의 관계였다. 우리가 흔히 키레네학파라고 칭하는 것은 현재 리비아의 지역명으로 그의 출생지를 염두하고 붙인 이름이다. 그의 철학적 주장이나 감정에 관한 언급들은 책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다. 전문학자들은 아리스토포스의 감각, 감정에 관한 주장들과 일화를 충실히 들어 온 그의 딸인 아레테의 아들 아리스토포스 2세가 키레네학파의 실제적인 창시자라고 간주한다. 어찌됐든 아리스토포스 2세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그의 주장의 요체는 감각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그 감각 중에서도 신체적 쾌락이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 최고선이라는 것, 최고의 감정은 신체의 감각적 쾌락에서 온다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쾌락은 뭘까? 이들은 쾌락을 일종의 운동(움직임)으로 파악했다. 다시 말하면 감각에 주어지는 부드러운 ‘운동’을 쾌락이라 말한다. 이와 반대로 부드럽지 않고 딱딱하거나 거친 운동은 쾌락이 될 수 없고 고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쾌락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감각의 운동도 있을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들도 쾌락과 불쾌사이의 중간부분을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 또 우리는 쾌락 같기도 하고 고통 같기도 한 애매한 성질의 감각운동도 생각할 수 있는데 키레네학파에서는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 운동이 도대체 뭘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감각에 주어지는 부드러운 운동’의 운동의 자리에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어도 의미상의 큰 차이가 없다. 운동은 느낌이나 감정인 셈이다. 감각 주어지는 부드러운 감정이나 느낌이 쾌락이다. 한 여름의 목이 한참 마를 때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키스의 달콤함보다 더 부드럽다. 삼겹살을 좋아하던 사람이 오랜만에 고기집에서 입속에 터지는 육즙을 맛본다면, 그 쾌감은 적어도 몇 시간 갈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흔히 ‘남들이 먹는 짜장면’을 보면서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이 키레네학파가 말하는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의 감정이다.

왜 아리스티포스는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한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을 그토록 강조한 걸까? 그들이 도덕감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사상가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포스는 예측이 불가능한 삶에 대한 거대담론, 모든 것에 대한 과도한 의미 찾기가 썩 현명한 행위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것은 ‘딱딱하고 건조한 정신리듬과 육체의 피로’를 가져온다. 그는 감각적 즐거움이 가장 쉽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라고 선언한다. ‘수고의 경제학’이라는 것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포스 자신은 어떻게 감각적 즐거움의 감정을 맛보았을까? 당연히 그는 자신의 쾌락의 철학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인생에서 매춘, 매춘부와의 동거는 감각의 즐거움을 맛보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 아테네의 매춘부는 하층계급을 상대하는 그룹과 상류층에게 매춘을 하는 두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아리스토포스는 ‘헤타이라’라 불리어지는 고급 창부와 성애를 즐겼다. 그러나 그는 섹스 중독자는 아니었다. 성애의 극단을 보여주는 영화 『감각의 제국』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섹스중독 이상으로 극단적인 성애를 추구하다 남자의 성기를 자른 아베 사다라는 여성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인간이 얼마만큼 감각의 즐거움을 극단으로 몰고 갈 수 있고 쾌감을 즐거움을 잊을 수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경우는 흔히 말하는 쾌락주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 다시 말해 쾌락에 몰입하면 할수록 쾌락을 멀어지고 채워지기 힘들다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듯이 아리스토포스는 아베 사다가 아니다.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것은 조절가능한 감각적 즐거움을 얼마든지 누리라는 말이다. ‘맛집 찾아 삼만리’가 나쁠 이유가 없고 ‘사랑하는 이와의 성애의 즐거움’을 절제할 이유도 없다.

감각적 즐거움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만큼 육체적 고통이라는 견디기 어려운 불쾌한 감정을 피하는 것에도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포스와 그의 제자들의 생각은 인간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닐까. 육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과잉진료도 마다하지 않고 기능성 식품에 목을 메기도하고 <몸신>이나 <천기누설>과 같은 방송에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역시 우리 사회에 유독 많다. 자살은 고통의 감정을 벗어나기 위한 자살이 사회적 원인에 비롯되기도 하지만 쾌락감정의 소멸이 가져온 개인적 선택이기도 하다. 아리스티포스의 제자인 헤게시아스는 고통의 원천봉쇄로서 자살을 권한다. 이 자살은 이기적이며 실존적 인식의 결과라는 점에서 철학적 죽음이다. 자살은 쾌락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고통으로 벗어나려는 소극적 행위이다.

아리스티포스가 말하는 감각적 즐거움에 찬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무엇인가? 견딜 수 있는 한 마음 가는 대로 먹고 마셔라가 아닐까. 비만 걱정을 생각해 보자. 비만 걱정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비만 강박을 요란하게 퍼뜨리는 비만·미용 산업의 종사자들이다. 비만 때문에 고민하고, 요요현상으로 좌절하는 것보다 식도락을 즐기는 것이 낫다. 그것은 거대한 비만·미용 산업에 대한 저항의 성격과 함께 정신적 스트레스라는 정신의 고통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살빼기 강박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이다. 경제적 고통까지 감수하는 경우라면 더 더욱 피해야 할 것이다. ‘감내할 수 있는 한 즐겁게 먹고 마셔라’, ‘삶을 즐기라고 그는 우리에게 설교한다. 오늘날 ‘카르페디엠(CARPE DIEM)’, 욜로(You Only Live Once)를 외치는 사람들은 충실한 아리스티포스주의자이다. 그들을 비판하는 성실맨들도 마음한 곳에서 욜로와 카르페디엠을 외친다. 누구나 잠재적인 아리스티포스주의자인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리스티포스보다 ‘감각이 감정이다’는 철학의 현명한 실천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말하지 않은 감각적 즐거움을 어떻게 최적화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광고라는 비서, 기능성 식품, 오락상품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의 재발견’ 시대에 감각이 곧 감정이다. 엉뚱하지만 여기에 밀의 해악의 원리라는 조미료를 더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감각의 즐거움을 즐겨라. 그것이 곧 최고의 감정을 누리는 길이다’라는 새로운 정언명법이 탄생한다. 감각이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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