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보면 전라도 남원에 사는 김개인이란 사람은 개를 몹시 사랑한 인물이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하여 길에서 잠이 들고 말았는데, 갑자기 들불이 번지면서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개는 몸에 물을 적셔서 주인을 살린 뒤 죽고 말았다. 술이 깨어 자초지종을 알게 된 주인은 개를 좋은 곳에 묻어주었는데, 그곳에서 나무가 자라나 후에 그 지역을 오수(獒樹)라고 명하였다. 현재 전북 임실에 있는 오수역을 배경으로 전해지는 충견(忠犬)의 이야기이다.

반면 『사기』에는 제나라 책사 괴통이라는 신하가 나오는데, 그는 왕 한신에게 한나라를 배반하고 천하를 삼분(三分)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모반을 꾀한 괴통을 삶아 죽이려 하니, 괴통은 “도둑놈의 개도 요임금을 보면 짖습니다. 요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원래 그 주인이 아니면 짖기 때문입니다. 그 때 당시, 저는 한신이 있는 줄만 알았지, 폐하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천하에 뜻을 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폐하처럼 되지 못하는 것은 폐하와 같은 힘과 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모두 삶아 죽이실 생각입니까?”라고 하니, 유방은 괴통을 풀어주었다. 여기서 생긴 고사가 ‘걸견폐요(桀犬吠堯)’이며, 이는 자기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주구(走狗)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 이야기들은 개가 자기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충견과 주구라는 상반된 평가로 나누어진다. 오래 전부터 개는 인간과 반려하며 살아온 친숙한 동물이다. 항상 인간과 동고동락하며 유익함을 주는 동물이지만, 문학적 표현에서는 불명예스럽게도 부정적 이미지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나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여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냥개처럼 좋지 않은 권력의 앞잡이로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걸왕과 요임금은 폭군(暴君)과 현군(賢君)으로 대비되는 인물이지만, 걸왕의 개는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이 당연하다. 개는 자기가 섬기는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기에, 걸왕의 개에게는 잘못을 탓할 이유도 없다. 상대가 인(仁)한지, 비인(非仁)한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직 주인만을 위해 맹목적인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 이는 개이기에 가능하고, 동물이기에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걸견(桀犬) 같은 무리들이 우리 사회, 우리 주변에서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은 오로지 충성만을 강조하고, 견공(?)들은 순순히 복종할 뿐이다. 이러한 견공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워주는 주인이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얼마든지 짖어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며 비위(非違)와 불의(不義)로 얼룩진 허랑한 주인일지라도 연신 꼬리를 흔들며 견주(犬主)의 관심을 끌기에 여념이 없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보편적 가치나 도덕적 기준마저도 이들에게는 무시의 대상이며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애초에 선악(善惡)과 진위(眞僞)의 구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세상의 손가락질과 주변의 지탄에서도 달관의 경지에 올랐다. 사회의 보편적 가치 기준이 엄연히 존재하고, 성숙한 시민의 냉철한 시선들이 주변에 가득한데도 말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견공화(犬公化)’ 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이들이 제한된 공간에 갇히고 나서야 자신들이 범한 우(愚)를 뒤늦게 후회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비 내리는 날씨에 익숙한 촉(蜀)나라의 개가 어색한 해와 달을 보고 짖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짖는 폐를 끼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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