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 에스제이에스법의학연구소장의 연재물 [서중석의 싸인(Sign): 삶과 죽음의 진실게임]을 싣습니다. 서중석 소장은 지난 2011년 방영된 국내 최초의 메디컬 수사 드라마 ‘싸인’의 주연인 박신양이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법의관 윤지훈 역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2012년 7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12대 원장으로서 국과수를 이끌었으며,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박초롱초롱빛나리 양 유괴사건’(1997년), ‘대구지하철 참사’(2003년), ‘서래마을 프랑스인 영아 살해사건’(2006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사망사건’(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2009년) 등 1990년대와 2000년대 굵직굵직한 대형사건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과수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중석의 싸인(Sign): 삶과 죽음의 진실게임] 
1. 검시제도를 말하다…용기만으로는 지켜내지 못할 미래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촛불의 물결과 함께 탄생한 새 정부가 그간 켜켜이 쌓여온 어둠을 하나씩 걷어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다. 특히나 최근 사회의 최후 보루로 여겨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그렇다. 판사들조차 일반 시민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을 벌여왔다는 사실에 많이 민망해하고 좌절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상은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관념을 떠나 건강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변화해야만 한다. 그 중에서도 본 편에서는 검경수사권 조정이라는 정치적 어젠다와 맞물려 매우 중요한 개혁과제 중 하나 변사자 처리를 포함한 검시(檢屍) 제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1. 세월호, 그리고 유병언

죽음의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반드시 필요한 게 부검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변사자 처리는 형사소송법 제222조에 따라 검사가 검시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 변사현장은 경찰 수사관 및 현장조사요원들이 경험과 매뉴얼에 따라 검시하고 이를 검사에게 보고하며 변사자 부검여부가 검사 책상에서 상당수 결정되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기도 하고 사건현장이 왜곡되기도 하며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몇 년 전 세월호가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췄을 때 가장 중심에 섰던 인물, 유병언 사망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감정결과 진위를 놓고 온 사회가 심한 불신으로 가득 찼던 기억 때문이다. 

필자로서는 법의학이라는 학문이 갖는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더 말할 나위 없이 안타깝다. 특히 정치적 사건에 관련된 변사자를 부검할 경우 이를 담당한 법의관들은 정당한 법의학적인 판단에 앞서 민감한 사회문제로서의 판단으로 이미 결론을 내는 여론과 사회적 상황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기 일쑤다.

 

#2. 1987, 박종철

돌이켜 보면 군사정권 시절,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떠오른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는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과장이었던 황적준 교수 집도로 고문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 민주화 역사의 물줄기를 틔웠다. 30년 전과 비교하자면 그 때의 척박한 근무 환경은 오늘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와는 견줄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법의학자의 부검행위가 공권력 남용을 밝혀내고 새로운 민주주의 역사를 쓰게 하는 단초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일 때문에 황 교수는 상당기간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법의학에 대한 굳건함이, 신념이 없었다면 1987년 6월 그날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 '1987'의 한 장면.

통상 정치와 관련한 사건은 법의학이나 법과학이 관여하기 전부터 이미 정치적으로 재단되는 씁쓸함을 안고 있다. 아무리 정확한 과학적 판단을 제시해도 국민들이 쉬 납득하지 않는 까닭이다. 감정인들의 절망과 고통으로 인한 좌절이 반복되고 있는 연유다. 그 이유엔 검시제도가 있다. 우리나라 검시제도 상 법의학자나 법의관은 현장을 가보지도 못한다. 수사기관이 제시한 판단자료에 근거해 부검을 하고 특히 살인사건, 폭행치사 사건 등에선 사건현장에 대한 정보도 없이 변사자가 지닌 손상만으로 그들이 어떻게 사망하게 되었는지를 해석하는 일, 소위 사망력을 밝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범인이 체포되는 날이면 그간의 법의학적 해석은 낱낱이 검증의 칼날 앞에 선다. 

 

#3. 숨진 30대 여성의 '싸인'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었을 거다. 저녁 뉴스에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사건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최초 단순 변사로 신고된 사건은 30대 여성이 피해자다. 그는 집에서 외국인 친구에게 폭행당해 사망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그의 어린 딸이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영혼의 외침 때문이었을까. 재판부는 딸의 목격 진술을 증거로 채택, 피의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 증거로 채택된 목격자 진술 연령이 새로 쓰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수 국민은 이 재판 이면에 법의학적 해석이 결정적으로 참고, 검증됐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필자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그날 오후 법정에서 필자는 부검 집도의로서 변사자에 대한 법의학적 해석을 통해 피해자가 단순히 넘어진 게 아니라 4회 이상의 타격을 받았을 가능성, 머리에 손상을 받은 뒤 곧장 숨진 것이 아니라 수 시간 경과 후 뇌출혈로 숨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진술했다. 이것은 어린 딸의 진술과 거의 동일한 양상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됐다. 

외국인 측 변호사와 급파된 자국의 법의관의 반박도 거셌다. 그들은 피해자의 사망이 “단순히 넘어져서 발생된 뇌출혈”이라 주장했으나 필자는 이에 대해 손상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반박했고 법원은 이 진술이 있은 후 유일한 목격자 딸의 진술을 증거로 채택, 철저히 검증한 끝에 유죄를 도출해낸 것이다. 

 

#4. 검시제도가 제대로 서야 하는 이유

법의관은 보통 임상의사보다 낮은 보수를 받으며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고독한 직업이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검시제도 속에서 후배 법의관들은 불합리한 검증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 있다. 선배 법의관으로서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이 밀려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법의관들에겐 영원한 동료들이 함께한다. 바로 현장을 지키는 수사관들이다. 초동수사를 통해 추정됐던 변사자의 사망 종류가 부검으로 달라지는 과정에서 간혹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법의학이 빛날 수도 없다. 

법의학은 과학이다. 진위여부를 여론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되고 이를 존중해 주는 것이 건전한 사회다. 아직 사회 여건은 그렇지 않으나 법의관들은 주어진 곳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소임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용기 내 사실을 이야기하며 이로서 세상은 지켜지고 바꿔진다. 보통 사람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꿈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검시제도가 제대로 서야 한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5000만 국민을 보살피고 있는 법의관, 법의학자의 수는 국과수나 대학을 합쳐도 50여 명에 불과하다. 최근 행정안전부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듯 국과수 법의관 미충원율은 43%나 된다. 검시제도 개선은 법의학의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법의학적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점도 물론 있긴 하나 진선미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의학 미래를 교육하고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검시관의 자격과 직무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할 그 날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서중석 소장은

-1957년 1월 3일 전남 여수 출생
-서울 양정고, 중앙대 의과대학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중부분소장·법의학부장·원장 (1991년부터 2016년까지 25년 재직)
-연세대·고려대·경찰대 외래교수, 대한법의학회·아시아법과학회 회장,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WFF) 의장 등 역임
-대전보건대 14대 총장 
-금강일보 제2기 독자권익위원회 위원장 
-수상: ‘유한의학상’, ‘서울시의사회 의학상’, ‘외교통상부장관상’, ‘대통령 표창’(과학수사대상), ‘홍조근정 훈장’, ‘몽골정부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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