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양반가 경제사정 담은 문서 '윤돈화회문기'

김진우
(사)뿌리문화 이사장

노성 입향조 윤돈은 윤선지(尹先智)와 평산신씨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윤돈의 형 윤의(尹曦)와 아우 윤욱(尹昱)은 경기도 파주에 살았고, 윤돈만이 통정대부(정3품품계) 류연(柳淵)의 2녀 문화류씨와 결혼하면서 1538년경 처가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尼山縣) 득윤면(得尹面) 당후촌(塘後村:논산시 광석면 득윤리)로 이주하면서 노성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윤돈은 1540~1550년대에 노성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첨정(僉正:종4품관직) 이었던 류연은 일찍이 이산현 득윤면 당후촌에 터전을 잡고 부유하게 살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아들 류서봉(柳瑞鳳)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두 딸만이 남게 되었다. 그중 첫째 딸은 한여헌에게 출가하여 그 후손들이 연산면 백석리 텃골에서 누대를 살게 되고, 둘째 딸은 윤돈에게 출가하여 득윤면 당후촌에 살게 된다.

이후 윤돈의 아들 윤창세에게 외가의 모든 전답이 분재되어, 윤창세가 이관 받은 전답으로 외손봉사를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다.

당시 윤돈이 처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화회 문서(和會文書,분재기 分財記)가 전해지고 있다. 이 화회 문서는 장인이었던 류연의 삼년상을 마친 1573년 8월 12일 자녀들이 모여 처가 재산을 나눈 문서이다. 윤돈은 59세의 일기로 죽었고 그의 아들 윤창세(尹昌世,1543~1593)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지금의 노성면 병사리(丙舍里) 비봉산(飛鳳山) 자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가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서모(庶母)와 아들이 없는 장모까지 한 집에 모셨다.

<윤돈(尹暾) 화회문기(和會文記)>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 입향조인 윤돈(尹暾)과 관련되어 당시 양반가의 경제 사정을 자세하고도 정확히 전해 주는 유일한 문서이다. 윤돈 화회문기는 총 세 부가 만들어져 재산을 상속받은 각각의 집안에 보관되어 왔으나 두 부는 모두 소실되고 한씨 집안에서 보관하던 한 부만이 전해져 오다가 뒤에 파평윤씨 가문으로 넘어와 전해지고 있다.

윤돈 화회문기는 1573년(선조 7) 8월 12일 윤돈의 장인이었던 문화유씨 류연(柳淵)이 죽은 뒤 3년상을 마친 유연의 자녀들이 재산을 고루 나누어 갖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 의하면 유연은 2녀 1남을 두었으나 아들 유서봉(柳瑞鳳)과 장녀의 사위 한여헌(韓汝獻)은 이미 고인이 된 후였으므로 유연의 장녀와 차녀의 사위였던 윤돈, 유서봉의 처 이씨에게 상속된 재산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윤돈의 아들 윤창세(尹昌世)가 맡았다.

윤돈 화회문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봉사조(奉祀條)로 전답 8마지기와 노비 2구
2. 장녀(한여헌 처) 몫으로는 전답 207마지기와 노비 23구
3. 차녀(윤돈의 처) 몫으로는 전답 174마지기와 노비 17구
4. 3남 유서봉 몫으로는 전답 179마지기와 노비

윤돈 화회문기에는 각자의 자녀들에게 남겨진 재산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3남인 류서봉에게 남겨진 재산은 후에 그의 처 이씨의 요청으로 윤창세의 막내아들이었던 윤희(尹熺)에게 남겨졌으며, 윤희가 외손봉사를 하게 되어 봉사조로 남겨진 재산까지 이양되었다.<출처-논산문화대전>

윤창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자였던 외숙이 후손 없이 죽자, 홀로된 외숙모를 부모 모시듯 정성껏 모셨다. 뒤에는 문화류씨가의 봉제사를 아들 윤희(尹熺)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처가인 청주경씨(淸州慶氏) 가문의 유산 일부도 상속받음으로써 노성 병사리로의 이거가 가능했다고 한다. 바로 윤돈-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성 5방파가 파생되었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설봉공(윤수), 문정공(윤황), 충헌공(윤전), 서윤공(윤흡), 전부공(윤희)의 5방파(派)이다.

이들 5방파의 형성시기인 16~17세기 전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가가 흔들리는 혼란기로서 노종 5방파 인물들은 척화운동을 주도한 척화가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척화상소 문제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황의 아우 윤전(尹烇)은 강화에서 청군과 대치 중 순절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의 처 공주이씨는 강화에서 역시 자진(自盡) 순절하는 등 사족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 파평윤씨 노종 5방파의 세거지는 최초 노성에 자리 잡은 윤돈은 광석면 득윤리에, 윤창세는 광석과 서울, 윤황은 노성 병사리에, 윤황의 아우인 윤전은 당후촌에 거주하였고, 윤황의 아들 윤문거(尹文擧)는 석성에, 윤선거는 금산에, 윤증(尹拯)은 노성에 각각 거주하였다. 그런데 이들 소위 5방파 중에서도 윤황의 직계가 가장 번성하였다.

윤황의 슬하에 성장한 8형제 모두가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윤훈거, 윤순거, 윤상거, 윤문거, 윤선거, 윤민거, 윤경거, 윤시거이다. 이들 중 윤문거는 김집(金集)의 제자로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홍문관의 정3품).대사헌(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이조참판(종2품차관) 등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사직함으로써 명예에 초연한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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