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근·현대인물

▲윤심덕(尹心悳, 1897~1926)
여류 성악가. 본관 파평(坡平). 평양 출생.
1918년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그 후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음악회에 출연,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25년 토월회(土月會) 배우로 활약하다가 유행가수로 전향하여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레코드를 취입, 특히 ‘사(死)의 찬미’로 인기를 끌었다.
1926년 레코드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 갔다가 귀국길에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위에서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情死)했다.
▲윤효정(尹孝定, 1858~1939)
한말의 정치가·독립운동가로 자는 사성(士成). 호는 운정(雲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후 탁지부주사로 있었으며 1898년 제위(帝位) 양위음모사건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 그 곳에 피신해 있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의 관련자 우범선(禹範宣)을 고영근(高永根)을 시켜 죽이게 하고 귀국했다.
1906년 서울에서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이준(李儁)이 세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토대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1907년 11월, 유근(柳瑾)·장지연 등의 발의로 대한자강회를 발전적으로 해산,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그 총무가 되어 항일조직 확대에 힘썼다.
저서에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가 있다.
▲윤효중(尹孝重, 1917.12.5~1967.10.19)
조각가. 본관 파평(坡平). 호 불재(弗齋). 경기 장단 출생.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48~58년 홍익대학 교수로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1951년 유네스코 국제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1953년부터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5년 예술원회원에 선임되었다. 1957년에는 한국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청자·백자의 산업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965년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에 선출됐다.
작품으로 ‘이충무공 동상’, ‘민충정공 동상’ 등이 있다.
인구조사에서 파평윤씨(坡平尹氏)는 1985년에는 15만 4496가구에 64만 6632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인구가 71만 3947명이었다.
파평윤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기위하여 보던 과거. 대과) 급제자 332명을 배출했다.
이는 전주이씨와 안동권씨에 이어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 세번째 급제자수이다.
이 가운데 장원급제자가 10명, 무과(武科: 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86명,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934명, 음양과(陰陽科: 천문, 지리, 명과학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2명, 율과(律科: 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뽑던 시험)에 10명, 역과(譯科: 중국어, 몽고어, 일본어, 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41명 등 142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해 삼한갑족(三韓甲族: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의 명벌(名閥: 문벌이 좋은 집안)로 명성을 떨쳤다.

(사)뿌리문화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