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擇里地)는 300년 전 조선시대에 실학파인 이중환이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다. 충남의 지세를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태백산을 지나 달리던 속리산이 추풍령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다시 솟아 황간의 황악산(黃岳山)이 되고 전라에 들어가서는 무주의 덕유산이 됐으며 또 장수와 남원 사이에서 끊어진 후 서쪽으로 나아가 마이산(馬耳山)이 됐다.
이곳에서 돌산의 한 줄기가 다시 거슬러 북쪽으로 달려서는 주류산(朱旒山), 운제산(雲梯山), 대둔산(大屯山)이 됐고 충청에 들어가서는 금강을 등지고 계룡산이 돼 남북을 통하는 한 줄기의 큰 산맥을 이뤘다고 했다. 택리지에 나타나는 부여는 백마강에 임한 백제의 옛 서울이다. 공주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고란사 등은 모두 백제 때의 고적이다. 강변에 맞닿은 암벽은 기묘하면서도 맑고 깨끗하여 경치가 좋고 토지가 대단히 기름져 부자도 많다. 하지만 도읍으로 보자면 판국이 좀 작고 좁아서 평양과 경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금강의 북쪽과 차령의 남쪽은 땅은 비록 기름지나 산은 살기를 벗지 못하고 있다. 고을 서북에 있는 무성산은 차령의 서쪽 가지의 끝인데, 산세가 빙 돌아 있어 그 안에 마곡사와 유구가 있다. 골짜기에는 돌이 많은 곳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많고 논은 기름지며 목화와 조, 수수를 가꾸기에 알맞은 지역으로 생활이 넉넉해 떠나거나 옮겨 다닐 필요가 없는 낙토(樂土)이다. 지세는 산위에서 끝은 뾰죽한 모양이 없고 산의 허리 위로는 큰 돌이 없어서 살기가 적다. 따라서 조선시대 역학, 풍수의 학문에 조예가 깊은 남사고(南師古)는 ‘십승기(十勝記)’에서 유구와 마곡의 두 물줄기 사이를 병란을 피할 만한 땅으로 삼았다. 따라서 유구는 평시나 전시나 모두 살 만한 곳이다. 그러나 지세가 산 위에 모인 판국이라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인 조산(祖山)이 보이지 않고, 그에 따라 맑고 밝은 기상이 적은 것이 유성(儒城)보다 못하다 하였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한 고개를 넘으면 내포(內浦)다. 충청도에서 내포를 가장 좋은 곳으로 삼는다. 내포는 목화 심기에 적당치 않아 해안 주민들이 생선과 소금을 가지고 가서 유구의 목화와 바꾸어 간다. 그러므로 공주에서 오직 유구만이 내포의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독점한다. 내포라는 이름은 가야산 일대에 자리한 열 개 고을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