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그의 고향 봉하마을을 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입상.

10년 전 화창한 토요일, 비보를 들었던 바로 그곳에서 버스는 출발했다. 그가 서거한 지 10주기를 맞아 그의 고향을 찾는 길, 어느새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다지만 10년 전 그날처럼 평온하고 쾌청한 토요일에 같은 장소였다. 이 무슨 고약한 인연이란 말인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입상.

2019년 5월 11일 오전 8시 40분 봉하마을행 버스는 시동을 걸고 한밭대 캠퍼스를 나섰다. 2009년 5월 23일 갑작스럽게 날아든 비보에 멍해지고 먹먹해졌던 그날과 10년 후의 오늘이 한순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임옥상 作 ‘대지의 아들 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은 그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온 국민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대전 뚜벅이산악회(회장 남승훈)와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되새기며 처음으로 봉하마을을 향해 가는 감회는 묘했다. 무엇인가 밀린 숙제를 하고, 오래된 빚을 이제야 갚는 것과 같은 마음이랄까….

비극의 현장인 봉화산 부엉이바위.

버스는 3시간여를 달려 정오가 가까울 무렵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자리한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봉화산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烽下)’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1946~2009)을 배출했고, 사람 사는 세상, 유기농업과 생태마을로 상징되는 봉하마을은 입구부터 온통 노란색 물결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너럭바위 묘소.

‘그가 생존해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덧없는 생각이 들었다. 퇴임 후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대통령이자 봉하마을의 터줏대감, 관광가이드라도 된 듯한 그가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앞의 참배객들.

“봉하마을은 제가 태어나 자란 고향입니다. 친구들과 뛰놀며 칡을 캐고, 진달래 따 먹던 뒷산, 읍내에 있던 학교까지 걸어갔던 10리길, 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아내가 점심을 챙겨 건너오던 들판, 퇴임 후 복원에 힘썼던 화포천까지… 눈 닿고 발길 닿는 모든 곳에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저의 유년기 추억과 대통령 퇴임 이후 여러 시민들과 함께 가꿔온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앞에서 기념촬영.

그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이었던 사저 뒷산을 따라 오르자 너무나 가까이 그가 몸을 던진 부엉이바위에 당도했다. ‘왜 그는 그런 비극적이고 허망한 선택을….’ 이 역시 헛된 되새김이었고, 아쉬움의 메아리가 돼 귓가를 울렸다.

반갑게 해후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찰칵.

‘아주 작은 비석만 남기라’는 유언에 따라 남방식 고인돌 형태의 낮은 너럭바위를 봉분처럼 올린 그의 소박한 묘소에는 그의 수많은 어록 중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노무현재단 관계자가 봉하마을 입구에서 노란 풍선을 나눠주고 있다.

그 옆에 2011년 5월 세워진 흉상 ‘대지의 아들 노무현’을 제작한 임옥상 작가는 그를 ‘땅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대통령이 됐을 때도 그랬고, 봉하에 내려와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원형으로 태어나 원형으로 살고 원형으로 돌아간 사람, 그는 흙이고 땅이고 대지입니다.’

봉하마을에 설치돼 있는 ‘사람 사는 세상’ 홍보물.

글·사진=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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