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역사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며 조선건국 정당성을 위해 조선 입맛대로 재해석 됐어야만 했다. ‘우왕, 신돈 아들설’을 내세워 왕조유지 핵심인 혈통을 부정하는가 하면 국가의 기본 기능인 국방력에 의문점을 내세우며 그 정당성을 깎아내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말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지 못 했다’라는 것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황산전투처럼 이성계의 왜구 소탕업적을 부각시키며 조선개국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14세기 고려조정은 해적 따위도 막지 못한 무능하고 부패했던 것일까? 부각되지 못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2회에 걸쳐 조명해 본다.

왜구 그림

왜구는 신라시대 때부터 기록에 남아있는 해적으로 이 후로도 한중일의 기록에 꾸준하게 등장한 집단이다.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섞여 일본 정부가 주도적으로 왜구를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일본 정부도 왜구로 인해 피해를 입었고 이들을 막기 위해 노력을 했다. 왜구는 시대적·역사적 상황에 따라 발생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왜구는 14세기부터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노략질을 일삼았고 그 정도는 중국과 고려의 역사에 기록될 정도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경인(1350년)의 왜구라고 명명하고 있다. 왜구는 중국, 고려뿐만 아니라 대만에 식민지를 건설하는가 한편,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베트남을 노략질했고, 필리핀 마닐라 앞바다에서는 대 해전을 벌일 만큼 규모가 큰 집단이자 아시아 전체의 골칫덩어리였다.

왜구 그림2

이는 왜구가 수천 명 이상의 인원과, 수백 척의 배를 운용하는 체계적인 지휘체계가 있는 집단임을 입증하며 이들이 단순히 좀도둑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렇다면 왜구는 왜 군대와 같은 전력을 운용하며 노략질을 일삼았을까? 우선 14세기 일본의 내부사정을 알아야한다.

14세기 일본은 ‘남북조 시대’였다. 즉, 천황가가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내전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두 개의 정부는 지방 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무시한 채 공수표를 남발해 일개 도적과 해적들도 자신의 편에 서게 했다. 이런 혼란스런 일본 내부사정으로 인해 지방군벌과 해적집단은 통제에서 벋어났다. 또한 내전에는 자본과 식량이 필요했고 일본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자 이들은 국외로 눈을 돌려 왜구로 기록됐다.

고토열도

왜구의 출신지는 한반도·중국과 가장 가까운 규슈지역 해적이 다수였으며 규수 북쪽에 위치한 고토열도로 모여 배에 올라 노략질을 위한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항해기술로는 원한다고 상륙장소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바람이 흐르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때문에 보통 바람방향이 서쪽(고려, 중국)으로 바뀌는 음력 3월 이 후 출발 해 10월까지 활동을 했다.

복건성의 위치

왜구들이 가장 선호했던 지역은 당시 원나라의 절강성과 복건성으로 이 곳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자 도자기와 비단의 산지였다. 때문에 산동반도에 도착한 왜구들은 1,2년간 노략질을 일삼으며 남하해 절강성과 복건성에 들려 본거지로 돌아가기도 했다. 원사의 기록에 의해면 ‘왜구가 1358년부터 크게 활동하더니 태창(중국의 대표적 항구)에 제집 드나들 듯 침략 한다’라고 기록돼있는가 한편, 절강성의 도자기, 비단공장을 점거해 몇 달 간 생산한 후 생산품을 약탈해 돌아간 적도 있다고 한다.

비단

왜구가 이렇게 중국에서 활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14세기 원나라의 명운이 다해 전국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아 내부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원명교체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왜구는 본국의 내전에 필요한 자원과 중국의 혼란스런 국내정세를 이용했던 것이다. 또한 일부 중국의 반란군과 원나라의 부패한 관리들은 왜구와 결탁해 그들의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국 못지않게 왜구에게 피해를 입은 고려의 경우는 어떨까? 고려의 경우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500척에 달하는 왜구가 침략을 해왔다. 기록된 대규모의 침략만 539회나 되었고 특히 우왕 때 400여 회나 침략을 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기록되지 않은 침략까지 생각한다면 천여회가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왜구는 한반도의 식량창고격인 삼남(전라, 충청, 경남)을 집중적으로 침략했고, 특히 식량을 운송하는 조운선이 그들의 핵심 목표였다. 하지만 바다위에서 조운선을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왜구들은 조운선의 목적지인 교동, 강화, 한강포구에서 조운선을 약탈했다. 왜구들이 강화와 교동 앞바다를 3년간 점령하기도 했다.

조운로가 막히자 고려의 조운체계가 육로로 바뀌었고 그 만큼 운송비용과 시간이 소모됐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입수한 왜구는 육상으로 상륙해 양민들을 도륙하고 약탈하기 이른다. 왜구는 ‘우리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우리를 막는 자가 없구나, 여기가 바로 낙원이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자유롭게 한반도를 유린하고 다녔다. 해안가 주민들이 왜구를 피해 내륙으로 이주하자 해안의 농어업은 황폐화 됐고 내륙의 농지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고려의 기록에도 이를 뒷받침한다.

양촌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흥해라는 고을이 있는데 땅이 가장 궁벽하고 험조하나 어업, 염업과 비옥한 토지의 생산이 있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많았는데 중간에 왜란을 만나 점차로 줄어들어 경신년 여름 이르러서는 더욱 맹렬한 화를 받아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들이 살해와 약탈을 당하여 거의 없어지고 그중에 겨우 벗어난 사람들은 흩어져 사방으로 가버려 마을과 거리가 빈터가 되어 가시덤불이 길을 덮으니 수령으로 온 사람들이 먼 마을로 가서 움츠리고 있고 감히 읍 안에 오지를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 권근의 양촌집, 흥해군 신성 문루기 중 -

이는 해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있으면 왜구가 침입하므로 마을을 비우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꾸며 근처 산이나 동굴에 숨어살고 가끔 마을로 찾아오는 생활을 한 것이다. 왜구의 피해 자발적으로 마을을 소개한 흥해군 주민들의 삶을 옅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흥해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마을소개를 했지만 정부는 왜구에 의한 피해를 막기위해 공식적으로 해안지역 마을을 소개하고 행정 군청을 이동하는 등(장흥에서 나주)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구로부터 백성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고 부패했던 왕조였을까?

당시 동북아시아는 원명교체기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원나라의 권위와 영향력이 약해지자 중국 내부에서는 반란이 들끓었고 북방유목민족은 그 틈을 타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 때부터 외국인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몽골의 황금씨족(칭기스칸의 혈족)의 일족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유례없는 특별한 관계를 이어온 국가였다. 따라서 원의 위기는 고려의 위기라는 등호가 성립됐고, 중국의 반란세력인 홍건적과 원나라에 반대하는 유목민족들이 끊임없이 고려를 침공했던 상황이었다. 특히 홍건적의 침입은 그 피해가 막대해 개경이 함락되는 등 고려의 명운이 달릴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한반도가 통일 된 이후 한반도의 군사전략은 북방에서 침략하는 적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기에 고려의 국방력의 대부분은 북방에 집중돼있었고, 군사전술 또한 대 북방유목민족 전술이었다. 경인년 전의 왜구는 그저 귀찮은 좀도둑일 뿐이었다. 따라서 경인왜구의 등장은 고려 조정과 군 입장에서는 나라의 명운을 뒤흔드는 강력한 북방의 침략자들을 상대하는 도중 등장한 전혀 새로운 군대(해군)와 전략(해전)을 가지고 온 불청객이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양면 전쟁을 펼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왜구를 막기 위해 투입한 부대가 왜구들에게 격퇴 당하니 고려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놓이게 된다.

여몽연합군으로 왜를 공격한 쿠빌라이 칸

하지만 고려는 두 손을 놓고만 있지 않고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고려는 왜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항의하고 해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왜 정부는 규슈를 침공하여 왜구를 토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생하자 왜구는 군량미과 군자본이 필요했고 역설적으로 고려가 더 큰 피해를 입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한 고려의 압박이 거세지자 왜 정부는 ‘옛날 여몽(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공격 때문에 무역로가 끊겨 발생한 일이라며 근본적인 책임이 없다’ 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고려는 북방의 적을 막는다는 핑계로 왜구에게 고통 받는 백성을 외면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1358년 400척의 왜구 함대가 각산을 공격해서 이곳에 정박해 있던 고려선박 300척을 태웠다. 이는 고려가 왜구를 막기 위해 준비 중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며, 그에 앞서

공민왕

1363년 이작도로 왜구 213척이 침공해 조운선을 약탈하자 공민왕이 주요 병마사를 파견에 선단 호위를 명령했으나 훈련된 수군이 아닌 육군을 배에 태운 격에 불가해 병력의 8할이 전사하고 주요 지휘관 다수 전사했다. 또한, 1374년 경상도 합포에서 고려군 5천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는데 이 때 공민왕이 극대노해 지휘관 김행을 능지처참한 후 시신의 조각을 각도로 보내 각 행정관에게 경고를 한 사건도 있었다.

북방의 적을 막는 동시에 왜구를 소탕하려 했으나 국력을 집중 할 여력이 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군대와 전략에 고전했던 고려군과 조정은 북방의 안보가 안정됐던 공민왕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왜구 소탕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육방론’, 우리는 육전에 강한 정규군이고 왜구는 해전에 강하니 왜구가 상륙할 때 토벌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상륙을 허용하는 순간 왜구에 대한 이동경로를 추적불가능하고, 해안선이 긴 한반도의 특성상 해안을 지킬 병력이 부족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고려의 신하들이 무능해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고려에 수군이 없었고, 백성들은 배를 타는 것을 곳 죽음이라 받아들이던 풍조가 있었기에 고려의 수군양성 계획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프로젝트였다. 또한 새로운 것의 등장은 구세력의 반대에 붙이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전문수군을 양성해야한다는 상소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중간관리자에 의해 막혀 최종 승인자인 공민왕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최영장군

하지만, 실패가 반복되자 고려는 옳은 방법을 찾기로 전략을 수정했고, 명장 최영이 바다에서 왜구를 막자는 ‘해방론’을 전면에 내세웠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군 10만 명과 함선 2000척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냈다. 최영의 주장은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 같았지만 실제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잇는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이 규모의 전력이 필요했다. 고려조정은 실제적으로 육방론은 불가능함을 알았지만 해방론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제정적인 부담이 있었다.

정지장군

이때 정지라는 인물이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정예수군을 양성한다면 5년 안에 바닷길을 깨끗이 할 수 있으니 도순문사(군과 민을 관장하는 지방장관)와 같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수군을 양성하자라는 내용이었다. 즉, 군량미를 낭비하는 고위행정직을 없애고 소수 정예 수군을 양성하자는 주장이었다. 이 상소는 공민왕을 매우 흡족하게 했고 공민왕은 만주백관을 불러놓고 질타하며 정지를 정식 등용한다. 그리고 그는 관직생활 대부분을 왜구 토벌에 힘쓰게 된다.

-하편에서 계속-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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