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성기 도참의 특징, 송도 기쇠설
도참사상은 불확실한 미래의 길흉화복을 알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온 것으로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참사상은 풍수지리와 함께 삼국시대의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고려 태조는 도참사상을 강조했다. 오늘날 헌법과 같은 훈요 10조 중 산수순역설(山水順逆說)에 의거한 사원의 입지를 선정하고 서경(평양)이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인 까닭에 입지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또 풍수와 도참에 입각한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쪽의 지세와 산형이 모두 거꾸로 뻗었으니, 이곳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도 밝혔다.
고려의 전성기에 도참의 특징은 송도(松都·개성)의 기쇠설(氣衰說), 그리고 지덕을 이용해 나라의 운명을 연장하겠다는 ‘연기사상(延基思想)’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중기에 귀족 상호간의 충돌이 격화되고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자겸(李資謙)은 십팔자(十八子·李氏)가 왕이 되리라는 도참을 믿고 왕위를 노리다가 귀양을 가고 묘청(妙淸)이 ‘개경기쇠 서경왕기(開京氣衰西京旺氣)’를 논하면서 천도를 꾀했으나 김부식(金富軾 )일파의 반대에 부딪히자 난을 일으켰다가 패퇴했다.
고려 말 중국의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을 틈타 공민왕이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노선의 혁신정치를 감행하자 왕사 보우(普愚)는 “한양에 천도하면 해외 36국이 내조(來朝)한다”는 참설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 이후 고려 최후의 왕인 공양왕이 즉위했으나 불사(佛事)와 도참을 맹목적으로 믿어 재회(齋會)와 조궁(造宮)에 민력과 재력을 돌보지 않았다. 공양왕은 ‘도선비기’의 지리쇠왕설에 따라 마침내 한양 천도를 준비했다. 이 때 도교와 불교의 비합리적 미신에 회의적이었던 유학세력의 도전이 만만하지 않았다. 이들 신흥사대부들이 뒤에 이성계를 옹위한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을 형성했다. 도참사상의 영향인지 몰라도 고려는 왕씨의 시대가 가고 십팔자(十八子)인 이 씨가 결국 왕이 되어 조선을 맞이하게 된다.
도참은 천문·지리·음양오행·주술뿐 아니라 도교나 불교까지 원용됐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지리에 의한 도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풍수와 도참사상이 모두 참된 진리라고 보긴 어려워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시대적 사명에 의해 새로운 희망의 세상을 펼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 인식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