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과 귀족의 기득권, 새로운 시대를 막다

경자년(庚子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시작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을 필두로 시대(時代)를 읽을 수 있는 지혜로운 안목을 가져 널리 세상을 이롭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반만 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지혜 가운데는 국가의 장래를 살피고 미래를 예측하고 나라를 이끌어갈 이정표를 제시한 풍수도참가들이 있었다.

풍수도참가들의 비기(秘記)를 종합하면, 통일신라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개성의 송악산 시대를 예고하였고, 그 후 한양의 북한산 시대가 이어지고, 그 시기를 지나면 계룡산 중심의 새로운 시대가 개창할 것을 인지하였다. 또한 통일신라 경주 200년, 고려 개성 400년, 조선 한양 600년이 지나면, 백성이 주인인 공주(현재의 대전) 계룡산 800년 도읍과 그 후 경남 가야산 1000년 도읍을 주창하였다. 이는 자연의 원리와 이치, 또한 자연의 지세인 풍수를 통해 앞날을 미리 예측하였다.

풍수지리를 활용한 국가의 도읍(都邑:수도)을 선정하게 된 것은 문헌상으로는 고려의 개성이 시작이다. 왕건의 스승이자 국사(國師)였던 도선 대사는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고려 건국 후 오늘날 헌법과도 같은 훈요 10조가 반포되었는데, 풍수지리에 의한 내용이 3개 조문이 포함되어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특히,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의 지세가 국가에 대한 반역의 기운이 있어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이 지역은 현재의 충청과 호남이 되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도선은 고려의 개경에 200년 도읍 후, 한양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아래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문하였고, 금강 이남은 반궁수의 지세로 활이 도읍인 개경을 향하여 위협하는 형국으로 국가에 대한 반대 세력이 됨을 지적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후대 풍수가들은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지역으로 개경과 한양, 그리고 금강 이남의 명당을 살피게 되었다. 이에 자연적으로 풍수의 주산(主山)인 송악산과, 삼각산(북한산), 계룡산이 3대 명산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개성의 송악산과 한양의 북한산은 왕이 주인인 왕조의 도읍이 되며, 계룡산은 왕조를 배반하여 백성이 주인인 도읍의 터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고려 왕건이 개국한 후 200여 년이 되면서, 국력이 점점 쇠약해지고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내란과 외란을 겪으면서 개경의 지기(地氣)가 다했다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도선이 지목한 한양의 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 주인은 이씨(李氏)가 된다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設)이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지게 된다. 이에 이자겸을 필두로 이씨 성을 가진 이들이 왕이 되려고 앞다투어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최씨 무신 정권과 원나라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어 고려의 국운은 이미 쇠약하여 나라와 왕의 힘이 다하였다. 결국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왕위를 이(李) 씨 성(姓)을 가진 이성계에게 물려주게 되었고, 한양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새로운 나라 조선(朝鮮)이 건국하게 된다.

여기에서 역사를 통한 교훈으로 도선대사가 주문한 고려 건국 후 200년과 새로운 도읍지 한양의 목멱산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도선대사는 불교의 대 선사이면서 당시 전통적인 자생풍수와 중국의 풍수를 도입하여 오늘날 지리학과 지형학에 가까운 이론을 찾아 우리 국토에 접목하였다. 이에 개성과 서울, 대전의 지세가 사람이 살아가고 나라를 이끌어 갈 좋은 명당 터전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세 곳의 풍수 지세를 보면 여러 측면에서 공통되는 사항들을 함께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수지리의 기본인 자연의 이치와 기본 원리에서 모든 사물은 고정됨이 아니라 변화하게 됨을 알고 고려의 건국 후 200년 뒤 새로운 변화를 주문하였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로운 지역인 한양에서 시작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왕실과 귀족은 변화를 두려워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지 못 하였다. 그 결과 고려의 마지막 200년은 왕실과 귀족들의 어려움보다는 백성들의 어려움이 한층 더 심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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