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상해임시정부유적지 매표소

중국 우한(武漢)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2020년 3월, 또다시 3월 하늘을 우러러보며 유관순을 생각해보는 삼일절을 맞았다. 상하이 시내에서 지하철 10호선 신천지(新天地) 역에서 내려서 6번 출구로 나와 신천지 쪽으로 약 100m쯤 걸어가면, 왕복 2차선 도로 남쪽 변에 상해임시정부 건물이 있다. 건물 외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大韓民國上海臨時政府舊址)이라는 한자와 한글로 새겨진 현판이 붉은 담벼락에 박혀있어서 찾기 쉽다.

이곳은 개항 후 프랑스의 조계로서 외국인들에 의해서 최초의 서양 건축물이 세워졌다고 하여 ‘새 세상’이라고 하는 ‘신천지(新天地)’ 구역 바로 옆이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청사는 1919년 3.1운동 후 1개월 뒤인 4월 11일에 세운 청사가 아니고, 1926년 7월부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로 추격을 피하여 항저우(杭州)로 옮겨간 1932년 4월까지 일곱 번째 임시정부청사였다. 원래는 주택가였으나, 2018년 신천지가 확장되면서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명품매장과 카페와 갤러리가 줄지어 있다.

임시정부청사를 관람하려면 임시정부 현판이 새겨진 도로변의 건물의 매표소에서 입장료 20위안(약 3500원)을 내야 한다. 임시정부청사는 매표소 뒤편으로 폭 2m 남짓할까 싶은 비좁은 주택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립주택 4채를 매입하여 개조한 곳이다. 임시정부청사 개조작업도 정부의 노력이 아니라,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 민간회사인 삼성그룹에서 30만 달러를 기증하여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상해임시정부유적지 현판

골목에 들어서면 양쪽의 밀집한 연립주택들이 한눈에도 서민들이 사는 슬럼(slum)가라는 느낌이 완연하다. 임시정부청사 입구는 문 앞에 붙어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지’라는 사각형 표지만 없다면 다른 주택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검정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직원 옆으로 두 쪽짜리 비좁은 철문을 들어서면 두어 평이 될까 싶은 좁은 마당이고, 여기에서 오른쪽 문을 들어서면 입장권을 받는 여직원이 무표정하게 앉아있다.

비좁은 1층 내부에는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 사진과 함께 김구 주석의 흉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는 당시 사용했다고 하는 태극기가 걸려있다. 1층 가장 안쪽에 화장실과 주방이 있는데, 고단했던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다. 주방 앞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은 두 사람이 교행하기도 비좁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이다. 계단을 올라가는 벽에는 당시를 실감하도록 하려는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손으로 쓴 도표와 흑백사진들이 초등학교 교실 뒤편의 게시판 전시물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도로에서 바라본 청사

2층에는 주석의 집무실, 그리고 임시정부 6부 장들의 집무실이 2~3층에 걸쳐 있다. 물론, 이것도 당시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인접한 주택들을 매입하여 확장한 것이니, 당시 임시정부청사는 얼마나 옹색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3층은 임정의 활동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임시정부청사 내부는 실물도 아닌 복제품과 사진 자료들뿐인데도 일체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아마도 비좁은 내부에 관람객이 붐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규제를 할 요량이라면 간단한 팸플릿이나 기념엽서 같은 것이라도 비치하든지, 도록(圖錄)이라도 제작해서 판매하면 좋으련만 그런 성의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이 찾아오는지 모르겠지만, 눈으로만 감상하라는 상해임시정부청사는 차라리 개방하지 않는 편이 낫다.

임시정부청사 골목

정부도 ‘상해임시정부’를 거론하지만 말고, 서자(庶子)처럼 외면받는 상해임시정부청사에 더 관심을 가졌으면 싶다.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동안 산발적이고 다양하게 전개되던 독립투쟁을 한곳에 모아 체계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익의 이승만부터 고려공산당 이동휘까지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첫 청사를 세우게 되었다.

임시정부 첫 청사는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孫文)의 심복이자 상해 3대 청방(靑幇)중 한 명인 두웨성(杜月笙: 1888~1951)의 노력으로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 마련하게 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주 이사를 했다.

임시정부청사 입구

1932년 1월, 충청도 예산 출신인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이곳 임시정부청사로 김구 주석을 찾아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선서하자, 김구 주석은 그해 4월 29일 일제가 자국의 조계에 있는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1.28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 행사를 벌일 때 의거를 감행할 것을 지시했다.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려고 도시락형 폭탄을 휴대하고 행사장에 들어간 애국청년 윤봉길은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당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 공사 시게미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의거를 감행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임시정부 동판

당시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은 ‘중국군 100만 명도 해내지 못할 용감한 성과를 조선의 한 젊은 청년이 해냈다’며, 높이 평가하고 황포군관학교에 독립군 장교들 양성을 받아들이는 등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보복이 더욱 심해져서 이곳에 있던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제2기를 맞게 되었다.

프랑스 조계였던 상해 화이하이루는 영국의 조계였던 난징누(南京路)와 좋은 비교가 되고 있는데, 난징누가 외지인들을 위한 공간으로써 넓은 차도를 보행자 전용도로로 만들었지만, 화이하이루는 상하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써 다른 지역과 달리 인도의 폭이 차도만큼이나 넓은 것이 특징이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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