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예원 정문

상하이 시내의 중심에 있는 예원(豫园)은 명의 형부상서(刑部尙書)였던 반윤단(潘允端)이 아버지를 위하여 18년 만에 완성한 개인 정원으로서 원래는 현재의 관광촌인 예원상성(豫园商城)을 포함하는 5만㎡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으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亂) 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중국 정부가 복원하여 1961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원래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2만㎡ 정도인 예원은 1982년 중국의 국가 유적지로 지정되었는데, 호수 위의 아홉 번 구부러진 구곡교(九曲橋)를 건너면 조금은 투박한 대리석으로 세운 정문 오른쪽에 매표소가 있다. 예원의 정문 앞에는 구곡교가 놓인 호수여서 정문 전체를 카메라에 전부 담을 수 없을 만큼 옹색하다.(예원 개요는 3월 25일 자 참조) 

삼수당 앞 강택민 표지석

입장료는 40위안(한화 약 7000원)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예원에서 가장 오래된 삼수당(三穗堂)이 있는데, 정문과 삼수당 사이가 3~4m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옹색한 사이에 ‘바다 위의 정원’이라고 하는 해상명원(海上名園) 넉 자를 새긴 돌이 세워져 있다. 중국인들은 자기 과시적인 인물이 많지만, 상하이 출신으로서 중국 총리이던 강택민(江澤民: 1926~ )이 1999년 새긴 이 비석은 옹색한 공간을 더욱 옹색하게 해서 없애거나 한쪽으로 옮겼으면 싶다. 북경 외곽에 거대한 계곡을 막은 인공 댐 용경협(龍鏡峽)의 높은 바위에도 강택민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다. 금강산 등 곳곳에 붉은 글씨로 김일성을 새긴 어느 나라도 그 모양을 흉내 낸 것 같다. 

만화루

예원은 크게 삼수당, 만화루, 회경루, 점춘당, 옥화당, 정관당 일대로 나뉘는데, 건물 높이가 9m나 되며, 5개의 객실이 있는 삼수당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고 한다. 삼수당이란 당호는 ‘하나의 벼에서 세 개의 이삭이 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보리, 밀, 기장, 과일을 장식으로 풍년을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삼수당 편액 이외에 도시의 숲이라는 의미의 ‘성시산림(城市山林)’, 영대경시(靈臺經始) 등 편액 3개가 걸려 있다. 이것은 예원의 주인이 최소한 3번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대청에는 예원의 주인 반윤단이 직접 쓴 예원기(豫园记)가 걸려 있고, 반윤단이 문인들과 어울리던 당시의 모습을 고급 가구들로 재현해 놓은 모습도 볼 만하다. 이곳에서는 성황묘(城隍庙)에서 주관하는 과거 급제자들을 위한 잔치나 귀족과 문인을 위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성황묘는 마을 수호신인 성황신을 모시는 도교 사원이다. 

정자(연비어약)

중국에서는 정원을 원림(園林)이라고 하는데, 원림은 조성한 사람에 따라서 사가원림(私家園林), 황가원림(皇家園林)와 사원원림(寺廟園林)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원림은 우리의 정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대지에 나무와 바위 등으로 잘 꾸며진 대규모 인공산인 석가산(石假山), 호수와 누각, 지붕이 있는 긴 행랑(行廊)과 저택 등을 만들어서 주인의 문학과 예술적 취향을 잘 반영했다. 특히 예원은 화려한 창틀, 담벽에 둥근 혹은 타원형 등으로 다양하게 구멍을 내서 건너편의 호수나 나무 등을 보게 하는 문동(門洞) 등이 일품인데, 서귀포 정방폭포 옆에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복의 서복기념관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양산당

먼저, ‘가면 갈수록 경치가 아름다워진다’라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고사를 딴 행랑의 입구 양편에 사자상은 원시대 작품이라고 하는데, 왼쪽에 새끼를 발로 살짝 밟고(?) 있는 것은 암사자이고, 오른쪽 구슬을 밟고 있는 것이 수놈이다. 사자는 원래 중국에서 살지 않는 동물이어서 상상의 동물이고, 중국에서는 구슬이 우주를 통치하는 권력을 상징하고, 어미 사자는 발톱에서 젖이 나온다고 믿었다. 물론 예원을 조성할 때 지금처럼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어서 오솔길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회랑과 다리를 따라 40개의 정자와 누각. 연못과 석가산을 산책하며 감상하던 것과 달리 수많은 인파가 짧은 시각에 주마간산식으로 돌아보자면 부딪히기 일쑤이고 통로가 옹색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점입가경

점입가경도 구곡교처럼 구불거리는 통로로 만들었는데, 우측으로 들어가면 2층 누각인 만화루(万花楼)가 있다. 만화루는 원래 ‘화신각’이라고 했는데, 1843년 복원하면서 만 송이의 꽃이 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만화루'라고 고쳤다. 만화루 앞에는 수령이 200년과 400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오른쪽 은행나무는 정원의 주인 반윤단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삼수당 뒤로 2층 누각 앙산당(仰山堂)이 있고, 호수 건너 맞은편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도교 사상이 민족종교인 중국인들은 정원에 석가산을 즐겨 만들었는데, 석가산의 재료는 항주에서 생산되는 태호석(太湖石)이다. 예원의 석가산은 당시 유명한 건축가 장남양의 작품으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가산이라고 한다. 높이 14m의 석가산 위에는 ‘강을 내려다본다’는 의미의 ‘망강정(望江亭)’이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호수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만화루를 등지고 회랑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점춘당(点春堂)이 있다. 점춘이란 당호는 ‘당송 8대가’의 하나인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시구 ‘봄에 점을 찍는다’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동침할 여자를 고른다는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송대에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삼부자를 '3소'(三蘇)라고 일컫던 대문장가는 말년에 황주로 유배되어 살면서 농사짓던 땅을 ‘동쪽의 언덕’이라 하여 '동파'라는 호를 삼았다고 한다. 점춘당은 태평천국 난 때 소도회 본부로 사용되었으며, 내부에는 당시 소도회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면 2층이 가곡 무대

점춘당과 타창대(打唱臺)에서 화후당으로 가는 길의 벽에는 진흙으로 만든 길이 55m의 용이 있다. 마치 용이 벽 위를 타고 가는 것처럼 그려진 용벽(龙壁)에는 금방이라도 용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모습인데, 중국에서는 황제의 상징물인 용을 개인이 조각하는 것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예원의 용 조각 서문을 들은 황제가 관리를 보내어 사실조사를 명했는데, 반윤단은 “용의 발톱은 다섯 개이지만, 이것은 발톱이 세 개인 이무기이며 결코 용이 아니다.”고 극구 변명해서 처벌을 피했다고 한다. 사실 예원의 용 조각은 소의 머리, 말의 얼굴과 사슴의 뿔, 그리고 잉어의 수염, 개의 이빨, 매의 발톱, 물고기의 비늘 등을 조합한 독특한 형상이다. 

한편, 예원에서 안채인 내원(內園)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높이 3m, 무게 3t에 이르는 거대한 옥령룡(玉玲龙)이 있다. ‘강남 3대 명석(名石)’ 중 하나로 꼽히는 옥령룡에는 72개의 구멍이 뚫려서 밑에서 연기를 피우면 연기가 구멍마다 피어나고, 또 물을 부으면 구멍들로 물이 빠져나오는 것이 장관이라고 한다. 

무대에서 바라본 로얄석
후문

옥령룡의 맞은편에 있는 옥화당은 예원의 주인 반윤단이 옥령룡을 감상하고, 서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현재는 명~청 시대의 책상, 의자, 책장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내원(內園)에는 마치 중세 유럽의 광장이나 오페라 홀처럼 직사각형의 마당을 삥 둘러 지은 고희대(古戏台)가 있다. 고희대는 주인 반윤단이 손님들을 초청하여 경극(京劇)을 감상했던 장소로서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 2층 마루가 무대이고, 마당 좌우에는 관객들이 앉아 감상할 수 있는 객석이다. 무대와 마주 보이는 곳이 주인과 하객이 자리에 앉아서 감상하는 VIP석이다. 이곳은 원래 성황묘(城隍庙)의 부속 정원이었으나, 1956년 정원을 보수하면서 예원의 일부로 만들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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