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수월관음도

일본의 수도 도쿄는 우리의 서울과 같은 단일 도시가 아니라, 혼슈의 중앙인 간토(關東) 지방의 남부에 있는 도쿄시와 태평양 쪽으로 뻗은 이즈(伊豆)·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로 구성된 거대한 도쿄도(東京都)이다. 도쿄도의 행정구역은 23 특별구·26시·7정(町)·8촌(村)으로 나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도쿄라고 할 때는 도심인 23 특별 구만을 일컫는다. 도쿄는 1867년 왕정복고로 메이지 유신으로 교토에서 천도한 이후 일본의 정치·외교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 시내에서 동북쪽에 있는 아사쿠사(浅草), 우에노(上野), 닛포리(日暮里) 지역은 2차 대전 후 크게 발전한 신주쿠(新宿), 시부야(渋谷) 등과 비교할 때 크게 낙후된 구도심이다. 그중 아사쿠사는 그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에 이 일대가 풀밭이어서 한자로 ‘천초(浅草)’라 쓰고, 음독으로는 '센소', 훈독으로는 '아사쿠사'로 읽는다. 도쿄에서 열리는 지역축제(祭り: まつり)의 약 30%가 이곳 아사쿠사에서 열릴 정도로 도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아사쿠사에서 대표적인 관광코스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도쿄에서 가장 큰 사찰 센소지(淺草寺), 전통상점이 많은 나카미세 거리(仲見世通り)이다. 

센소지 본당 관음상
센소지 본당

센소지의 위상은, 도쿄에 가서 아사쿠사의 센소지를 보지 않으면 서울에 가서 인사동을 보지 않고 간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다만, 1923년 9월 관동대지진과 2차 대전 때 사찰 대부분이 소실되어서 현재의 건물은 1960년 이후 콘크리트로 지어서 사찰의 유명세에 비하면 문화재적인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 다만, 도심 속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사찰이라는 점에서 서울 시내의 조계사나 봉은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부형제 이야기 기록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남긴 문화가 전국 곳곳에 많은데, 센소지 역시 628년 백제 도래인 히노구마 하마나리(檜前), 다케나리가 어부 형제가 스미다강(隅田川)에 던져놓은 그물에 걸려서 나온 작은 관음상이 시초라고 한다. 당시 관음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어부 형제들은 마을에서 유일한 선비인 한반도 도래인 하지(土師中知)를 찾아가서 묻자, 그는 한눈에 관음상임을 알고 즉시 삭발하더니 자기 집을 절로 만들어 관음상을 모신 것이 센소지의 유래라고 한다.

그런데, 사찰 이름 센소(浅草)와 마을 지명인 아사쿠사(浅草)의 한자가 똑같아서 지명과 사찰을 똑같이 아사쿠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센소지를 사찰 아사쿠사 안에 있는 하나의 사찰 건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얼마나 많던지, 사찰 센소지의 홈페이지 FAQ에는 ‘불교 용어는 훈독으로 읽는 지명과 달리 대부분 음독으로 읽고 있으므로 사찰은 센소지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http://www.senso-ji.jp/faq/). 

롯폰기에 숙소를 정한 우리는 지하철 긴자선을 타고 아사쿠사역에서 내렸다. 아사쿠사역사는 아사쿠사의 지역적 특징을 말해주듯 전통 축제를 하는 걸개그림을 많이 그려놓았다. 아사쿠사역에서 1번 출구를 나와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천년고찰 센소지가 있다. 

일본서기는 720년 나라 시대에 덴무(天武) 천황이 백제의 멸망 후 도래한 백제계 왕자인 도네리친왕(舍人親王) 등에게 저술하게 한 일본 최초의 정사로서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한 이후, 지금의 도쿄인 간토 지방에 이주한 한반도 도래인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즉, 천지 천황(天智: 626~672) 5년 조에 '백제인 남녀 2000명이 동국(東國)에 살았다. 스님과 속인을 가리지 않고, 3년 동안 정부로부터 녹읍을 받았다.' 또, 천무 천황(天武: 672~686) 13년 5월 조에도 '귀화한 백제 스님과 속인 23명을 무사시국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지통(持統) 12월 조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인 62명을 받아들였다.'라는 기록 등이 있다. 

또, 천무 천황 원년(697년)부터 간무 천황의 엔랴쿠 10년(791년)까지 95년간의 헤이안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속일본기(續日本記)에도 도쿄 일대인 칸토 지방에 있던 사가미국(相模國), 무사시국(武蔵國), 히다치국(常陸國) 등 8개국의 기록과 함께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에 이주시키고, 이곳에 고구려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일본서기에 대하여는 5월 13일 자 일본 개요 참조) 

일본은 ‘신사(神社)의 나라’라고 할 만큼 전국 곳곳에 토착 종교인 약 8만 5000곳의 신사가 있는데, 신사는 오랫동안 불교사찰과 함께 존재해오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에서 절과 신사가 공존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불교탄압으로 신사를 존치하고 있던 사찰을 없앴지만, 센소지에는 사찰과 신사가 나란히 있다. 더구나 사찰 건물이 크고, 신사 건물이 작다는 점도 흥미롭다. 

아사쿠사 카미나리문

센소지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카미나리몬(雷門)이다. 카미나리몬은 후지산과 함께 일본을 상징하는 풍경의 하나로서 각종 여행안내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찰의 문으로서 현재의 카미나리몬은 1865년에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한 것이다. 그래도 센소지의 상징이 된 카미나리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높이 3.9m, 지름 3.3m, 무게 700㎏에 이르는 거대한 등(燈)과 함께 카미나리몬 오른쪽에는 풍신상(風神像), 왼쪽에는 뇌신상(雷神像)이 있다. 

사찰과 신사가 많은 일본에서도 입장료를 받고 있지만, 센소지는 입장료가 없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카미나리몬이 큰 도로에서 센소지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한다면, 센소지의 정문은 호조문(宝蔵門)이다. 호조문은 ‘보물창고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네 전통사찰의 금강문처럼 문 양쪽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카미나리몬과 호조문까지 약 300m 구간을 나카미세 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 길게 늘어선 수많은 가게는 에도시대부터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사쿠사의 명물이다. 근엄한 우리네 전통사찰과 달리 전통공예품과 먹거리를 파는 상점이 사찰 안에 시장 골목처럼 빽빽한 풍경은 교토의 청수사, 나라의 동대사 등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외국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사실 이런 풍경은 대만의 용산사에서도 보았다. 

고마이누

신사와 사찰 건물이 함께 공존하는 센소지에서는 본당의 관음상을 ‘센소 관음’이라 하지 않고, 특별히 '아사쿠사 간논(浅草観音)'이라는 음독으로 불리고 있다. 본당 왼편에 약사당이 따로 있고, 오른편에는 아사쿠사 신사가 있다. 신사 양편에는 커다란 고마이누(高麗犬) 석상이 있는데, 입을 크게 벌린 것이 수컷이고, 입을 다문 녀석이 암컷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고려(高麗)‘라고 쓰고 ‘고마’라고 발음하고, 개를 이누(いぬ)라고 하니, 결국 신사 앞의 수호신 ‘고마이누’는 ‘한반도의 개’임을 말하는 것이지만, 요즘 일본인들은 ‘고마이누'를 고마이누(狛犬)’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고려라는 한자(高麗)를 회피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5중탑

또, 호조문 왼편에는 큼지막한 목조 오층탑이 있다.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목조탑이 일본에는 많은 것은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목조탑의 보수나 재건이 어려워서 점점 사라졌으나, 일본은 근세까지 불교가 국교이고 또 소나무보다 훨씬 곧고 굵은 삼나무가 많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그밖에도 센소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간 고려 승려 혜허(慧虛)가 그린 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도 소장하고 있으나,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12~13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월관음도는 142㎝× 62.5㎝ 크기의 비단 위에 물방울 광배를 배경으로 화려한 천의(天衣)를 걸치고 한 손에 버들가지, 다른 한 손에 약병을 든 관음상으로서 ‘물방울 관음도’라고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라고 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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