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이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
존경하는 역사 인물에는 누가 있을까?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 보다 높은 순위의 인물은 누구?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은?

최근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함께 대학생 2700명을 대상으로 내가 존경하는 역사 속 인물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중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고 답한 대학생들에게 주관식으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적게 한 결과 유관순 열사가 가장 많은 표를 받으며 1위를 차지하였다.

출처 - 잡코리아 캡처

유관순 열사의 뒤를 이어서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등이 순위를 차지하였다. 상위권에 랭크 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았다.

 

출처 - 게티이미지 뱅크

유관순 열사

▶ 출생 : 1902. 12. 16

▶ 사망 : 1920. 9. 28

최근 잡코리아와 알바몬에서 대학생이 존경하는 역사인물 조사 결과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인물은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여성 독립가 중 대표적 인물이다.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하고, 1916년에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에 편입하였다. 이후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그 다음연도에 3.1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역에서 학생단 가두시위 운동에 참여하고 4월에는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며 독립만세운동을 계속하여 전개해갔다.

3월부터 계속하여 고진 고문을 받은 탓에 방광파열로 결국 순국하였다. 스무살도 안되는 꽃다운 나이에 유관순 열사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관순 열사는 암울했던 일제 치하 시대에 고난을 이겨내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나아가고자 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본받는다면 현재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페이스북

안중근 의사

▶ 출생 : 1879. 9. 2

▶ 사망 : 1910. 3. 26

2위를 차지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이다. 안중근의 본관은 순흥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한학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을 보고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를 세웠다. 이후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인재양성만으로는 기울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의병운동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마침내 거사를 치르게 되었다. 일본인으로 가장 하여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가와카미 도시히코,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지고 중국 뤼순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 2월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2월14일은 밸런타인데이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다. 이러한 달콤한 초콜릿을 주고 받은 날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 한 번쯤은 더 생각해보면 좋겠다.

 

출처 - 페이스북

백범 김구

▶ 출생 : 1876. 8. 29

▶ 사망 : 1949. 6. 26

백범일지 저서를 쓴 사람이자 한인 애국단, 신민회 등에서 활발히 활동한 백범김구 선생이 3위를 차지하였다.

백범 김구의 본관은 안동이다. 호는 백범, 본명 차우로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었다. 임영되고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머무르다가 김구는 체포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이후 탈출하여 신민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고 1928년에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이때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하였다.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 1935년에는 한국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1940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맞서 싸웠다.

8.15광복을 맞고 나라가 안정을 찾는가 싶었지만,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에는 나라가 쪼개져서 이를 통일시켜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릷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을 위해서, 광복을 하고나서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서, 이후에는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백범 김구는 끊임없이 살아왔다. 항상 나라를 위해 살아온 김구선생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 게티이미지 뱅크

이순신 장군

▶ 출생 :  1545년

▶ 사망 : 1598년

임진왜란에 나라를 지켜준 위대한 장군인 이순신 장군이 대학생들이 존경하는 역사 인물 4위를 차지하였다.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인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이순신은 30세가 넘어서야 관직에 나섰다.

이순신의 관직은 순탄치 않았다.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 물러났다가 이후 이순신은 자신이 관리하던곳이 여진족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장형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1589년 다시 곤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이후 왜군의 침략에 대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은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왜군을 격침시켰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전쟁의 장기화를 대비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병사들을 훈려시켰지만 이순신은 원균과 갈등을 빚으며 백의종군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자 이순신은 다시 복직되었다.

복직 된 이후 역사에 새겨지며 영화로도 나온 명량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은 이후 노량해전에서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죽을 때까지 오직 나라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불의를 어떠한 경우에도 나라만을 생각한 이순신 장군 덕분에 현재에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 게티이미지 뱅크

세종대왕

▶ 출생 : 1397년

▶ 사망 : 1450년

조선시대에는 많은 왕이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왕은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이 대학생들이 존경하는 역사인물 5위에 뽑혔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많다. 먼저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유교정치의 기틀 마련을 통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이 잡혔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편찬사업의 시행이다. 편찬사업을 한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역사서, 유교경서, 지리서, 농성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게 편찬하였다. 이러한 편찬서들의 제정 덕분에 백성들의 삶이 좀 더 윤택해졌다.

다음으로는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이는 세종대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하, 박팽년, 신숙주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이렇게 창제 된 훈민정음 덕분에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세종대왕은 감사한분이다.

세종대왕이 나라를 생각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한글이 아닌 한문을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덕분에 한글을 쓰고 있지만 무분별하게 줄여 쓰는 줄임말이나 욕설 등으로 가끔씩 아름다운 한글이 훼손된다고 생각한다. 훈민정음을 만들어준 세종대왕을 생각하며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면 좋겠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함께 설문조사를 실시 한 대학생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순위부터 5순위까지 알아보았다. 위의 인물들 말고도 윤봉길 의사, 도산 안창호 등 많은 인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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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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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역사 인물에는 누가 있을까?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 보다 높은 순위의 인물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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