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비들의 사표(師表) 박광후

이 밖에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는 효종, 숙종때의 선비로 나이 30세에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해 당시의 여러 어진 이와 깊은 교류(交流)를 나누고, 또 그의 마음이 정대(正大)해 조금도 불의(不義)에 굴하지 않은 투철한 선비였다.

광주의 아산리(현, 비아 도천동)에서 1637년(인조15) 6월 2일에 태어난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는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키어 북상출정(北上出征)한 진사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의 손자이며 박천용(朴天用)의 아들이다.

안촌은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해 학식이 높고 밝아 호남선비들의 사표(師表)가 됐다.

박원종 묘(왼쪽). 순천박씨 임향조 박인소의 처가인 진주정씨 묘역.
그는 약관에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총본산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의 문정(門庭)에 첫 길을 터서 조선중엽이후 침체했던 호남학계에 선풍적인 학풍을 또다시 일으키게 한 거대(巨大)한 횃불이었다.

학유 박광윤, 소은 박중회, 현강 유승, 박상지, 담락 민사하, 시암 박영림, 고두경, 유한징, 고가성 등 쟁쟁한 남도의 학자들이 학통(學統)을 계승하게 하고 빛내어 후세에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675년 우암 선생이 유배를 당하자 안촌 선생은 광주 나주 장성의 세 고을 유생(儒生)들과 널리 연대하여 스승의 구명운동을 펼치다가 혹독한 옥고(獄苦)까지 치르기도 하였으나,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1677년에는 손재 선생과 함께 감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장기해변(포항)에 위리안치중인 스승을 찾아 위문하고 순천박씨 최초(順天朴氏 最初)의 족보서문을 부탁하고 돌아왔다.

이로 인해 다시 한 번 옥고를 치를 뻔했으며 이듬해인 서기 1678년(숙종 4년) 12월15일 안촌은 42세 장년의 나이로 안청동 외성당(畏省堂)에서 세상을 떴다.

순천박씨 공신녹권-대여록(왼쪽). 박팽년 유허비.
정조 때 과거에 급제해 병조참판(兵曹參判: 종2품 국방차관)을 지내고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등과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한 박기정(朴基正)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워 박민웅(朴敏雄)과 함께 충절의 가문 순천박씨(順天朴氏)를 빛냈다.

순천은 현재의 전남 순천으로, 1995년 순천시와 승주군을 통합해 도농복합형의 새로운 순천시가 됐다.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34명, 무과(武科: 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 13명, 사마시(司馬試: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85명, 역과 2명 등 13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서 2000년에는 총 2만 7209세대 8만 763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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