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금강일보] 규슈 지방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일찍부터 교역한 흔적이 아주 많다. 특히 후쿠오카현과 나가사키현 사이에 있는 사가현(佐賀?)은 규슈의 교통의 중심지인데, 이곳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도공들에 의해서 형성된 도자기 마을 아리타(有田), 이마리(伊万里)가 있다. 사가현의 대표적인 도시 가라쓰(唐津)는 당나라로 가는 항구라는 지명이지만 사실 조선으로 가는 항구이자 온천으로 유명하다.

16세기까지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 조선, 베트남 3국뿐이었고, 일본은 아직 차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막부를 열면서 비로소 문화선진국인 조선과 중국의 선비들처럼 차를 즐기게 되면서, 질 좋은 차그릇을 수집하는 다도(茶道)를 신분 상승의 기준으로 여길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대부분 규슈 지방의 영주인 고니시(小西行長), 가토(加籐淸正), 구로다(黑田長政) 등 세 장수를 선봉장으로 삼았는데,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보잘 것 없는 일본 토기보다 월등히 질 좋은 조선의 찻잔과 주전자 등 다양한 차기(茶器)에 놀라 자기 약탈에 혈안이다가 나중에는 도공을 납치해 갈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5만~10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는데, 그중 도공, 석공, 목공, 인쇄공, 제지공 등 기술자가 유독 많았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할 정도로 도공은 일본군의 표적이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 도공을 납치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인 1596년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도공 이삼평(李參平)은 조선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지만, 그는 일본 도자기의 시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 가네가에(金ヶ江)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그의 본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이 산베에(三兵衛)라고 했는데, 이로써 삼평(參平 혹은 三平)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가 일본 성씨로 귀화하고, 또 산베에라는 군사 직위를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조선에서 왜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다가 국내에서 살 수 없게 되자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순왜(順倭)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1990년 일본인들이 공주 박정자삼거리의 조각공원에 ‘도공 이삼평 기념비’를 세우면서 비문에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건너간 것으로 표기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 비는 2016년 10월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 아래에서 도자기를 굽던 20대 청년 도공은 조선 침략의 선봉장 중 한 사람인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이던 사가현인 나베시마번(鍋島藩)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에게 끌려서 가라쓰에 도착한 뒤, 오기군(小城郡) 다쿠촌(多久村)에 살았다. 다쿠촌에 살면서 질 좋은 도자기 제작을 명령받은 도공은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찾아다니다가 1616년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이스미산(泉山)에서 우수한 고령토를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하여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만든 것이 일본 도자기의 시초였다.

당시 국제 정세는 임진왜란 후 대륙에서 명이 망하고 청이 건국되던 혼란기여서 유럽에서 최고가품으로 인식되던 명나라 도자기 수출이 부진하자, 나가사키에서 일본인들과 교역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삼평이 만든 백자에 눈을 돌렸다. 1650년 아리타 마을에서 12㎞ 떨어진 이마리 항을 통하여 유럽에 첫수출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자, 더 많은 도자기 생산을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리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1656년 8월 이삼평이 죽자, 일본인들은 백자를 처음 만든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하여 1658년 도잔신사(陶山神祀)를 세웠다.

오늘날 일본 도자기산업의 메카인 아리타 마을은 후쿠오카에서 차로 약 1시간가량 떨어진 산골인데, 주민 약 2만 2000명이 살고 있다. 첩첩산중이던 아리타 마을은 국도 35호가 동서로 횡단하고, 후쿠오카와 도시권을 잇는 국도 202호가 남북으로 있고, 또 JR 사세보선이 동서로 횡단하여 이마리와 아리타를 연결하는 마츠우라 철도가 남북을 다니고 있다. JR아리타역에서 JR우에아리타역(上有田驛)에 이르는 약 3㎞ 구간의 도로 양쪽에는 도자기 판매점이 줄을 지어 있다. 이곳에서는 1896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5월에 국제 도자기 시장이 열린다.

우리는 후쿠오카에서 렌터카로 다자이후로 가서 다자이후 덴만구와 규슈국립박물관을 둘러보고, 아리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아리타 마을 뒤로 가로지른 철도를 건너면 이삼평을 모신 도잔신사가 있다. 이 곳은 원래 오진 천황(應身天皇)을 모시던 신사였으나, 도공 이삼평의 신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오진 천황을 함께 모셨다. 도진 신사는 도자기 신을 모시는 신사답게 우리네 홍살문 기능을 하는 도리이(鳥尾)부터 안내문 등 모든 것을 자기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매년 5월 도조 이삼평의 도조제(陶祖祭)를 지내고 있다.
도진 신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약 300m쯤 올라간 산 정상에는 1916년에 세운 ‘도조 이삼평의 공적비’가 우뚝 솟아있는데, 이 곳에서는 아리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로써 일본인들이 이삼평을 얼마나 존경하고 신격화하고 있는지 잘 알게 된다.

사가현에서는 아리타 도자기를 집단으로 전시하며,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홍보하기 위하여 아리타 마을에서 약 5㎞쯤 떨어진 산속에 ‘아리타 포세린 파크(Arita Porcelain Park)’를 조성했다. 포세린 파크는 1993년 무네마사 주조(宗政酒造)회사가 아리타 도요지에 설립하여 운영하는 테마파크인데, 1975년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아리타 도자기를 후쿠오카박물관에 전시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18세기 초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독일 드레스덴(Dresden)의 즈빙가(Zwinger)궁전을 모방하여 지은 전시실에 에도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에서 생산한 대표적인 도자기들과 각종 명품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는 포세린 히스토리관이 있으나, 내부는 일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특별 기획전도 종종 열리고, 또 예식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아리타 도자기를 수입한 독일 작센 황제는 장인들에게 아리타 자기처럼 훌륭한 자기를 만들 것을 명령하자, 18세기 초 유럽 최초로 마이센 자기(Meissener Porzellan)가 탄생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명품도자기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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