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데지마 정문
데지마 정문

[금강일보] 나가사키는 1571년 포르투갈 선박이 최초로 입항한 후 서양 문물과 동시에 천주교가 전래된 개항장이지만, 이전부터 조선과 청과의 교역항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1543년 지금의 규슈 남부 가고시마현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하여 조총 두 자루를 전해주면서 호감을 얻고 나가사키 항을 개항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칼과 창으로만 싸우던 일본인들은 조총이라는 혁명적인 무기에 감탄하여 조총으로 무장하고 문화선진국인 조선 침략은 물론 중국 명나라까지 침략할 야심을 가졌다.

1586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예수회 선교사 총책임자인 포르투갈의 코엘로 신부에게 오사카성 아래에 천주교 성당 신축을 허가하면서 중국과 조선 정복에 필요한 대형 선박과 조총을 지원해주면, 점령지에 성당을 세우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그 약속이 빗나가자 천주교 포교 금지와 쇄국정책을 폈다. 하지만 1587년 도요토미가 규슈 지방을 정벌하러 왔을 때 주민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임에 크게 놀라 앞으로 큰 저항세력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선교사 추방과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데지마 축소모형
데지마 축소모형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이던 1597년 2월 에스파냐 선교사 4명, 포르투갈 선교사 1명, 멕시코 선교사 1명과 일본인 신자 20명 등 천주교 신자 26명을 묶어서 수레에 싣고, 바다 건너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사카이(堺)까지 33일 동안 600여㎞의 눈길을 끌고 다니며 백성들에게 욕보인 뒤, 이곳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에서 처형했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천주교 순교 사건인데, 순교 장소에는 기념탑과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츠(德川家康)는 1603년 나가사키를 직할지로 지정하여 개항하면서 무역이익을 독점하고, 지방정부의 무역행위는 금지했다. 또,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나가사키의 상인 조합인 마치슈(町衆)에게 인공 섬 데지마(出島)를 짓도록 하여 시내에 흩어져 살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들을 집단이주시켰다.

사무라이 복장
사무라이 복장

그 공사비는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매년 임대료 형식으로 받아 챙겼는데, 1637년 12월 이에 반발한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포르투갈인을 아예 일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무역이익을 버리지 못한 에도막부는 아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인근 히라도섬(平戶島)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데지마로 이주시켰다. 이후 데지마는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개항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일본 유일의 해외무역 창구가 되었다. 에도막부가 네덜란드 상인들을 우대한 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포르투갈인들의 천주교 포교와 달리 오로지 무역이익만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1년에 한 번 네덜란드 상관장이 교토의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하도록 하여 서양을 이해하는 창구로 삼았다.

데지마 실제지도
데지마 실제지도

데지마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공무가 아니면 외출이 제한되었고, 일본인들도 공무가 아니면 출입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1855년 일본이 네덜란드와 화친조약 체결 후 비로소 이런 제한이 풀렸다. 특히 1859년 미일 통상조약 이후 나가사키 이외에 도쿄 주변의 요코하마(橫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函館) 등이 개항장이 되면서 데지마에서 살던 외국 상인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스코틀랜드 출신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 링거(F․Linger) 등이 나가사키의 전망 좋은 언덕에 구라바엔이라는 넓은 집과 정원을 짓고 옮겨갔다.

나가사키 시내 남쪽 바닷가에 있는 약 1.3㏊(4000평)가량인 부채꼴 모양의 인공 섬 데지마는 1904년 주변을 메워서 육지와 연결되고, 1922년에는 국가사적지로 지정했다. 데지마는 동·서·중앙에 세 군데 출입문이 있어서 어느 쪽에서든 쉽게 입장할 수 있다.

네덜란드 세의사 기념공원
네덜란드 세의사 기념공원

나가사키에키마에(長崎駅前)에서 소호쿠지행 노면전차 1호선을 타고 세 번째 정거장인 데지마 역에서 내려서 3분 정도 걸으면 데지마 중앙 출입문인데, 데지마 역 근처에는 1624년 포르투갈인이 퍼트린 나가사키의 명물인 ‘나가사키 카스텔라’를 100년 이상 팔고 있는 전문점 ‘분메이도’가 있다. 시내버스는 나가사키역 앞 남쪽 출구의 신지(新地) 터미널에서 데지마 오모테몬바시에서 내리거나, 주오바시(中央橋)행 버스를 타고 주오바시에서 내리면 도보로 1~2분 거리이다. 우리는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을 관람한 뒤, 도보로 메가네바시(眼境橋)를 둘러보고 데지마까지 걸어서 가니 서문 입구였다.

데지마 입장료는 510엔이고,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개장한다. 연중무휴이다.

데지마는 넓은 골목 양쪽에 1층 혹은 2층 목조건물이 길게 줄지어 있는 거리를 재현했는데, 곳곳에 당시 일본 사무라이 복장과 칼을 찬 남성들이 서성거리면서 여행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팁을 받고 있다. 골목은 왼편부터 선장 주택, 무역품 창고, 네덜란드 수석서기관 주택 등이 중앙 게이트까지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 저택인 ‘카피탄(Captain) 주택’이 큼지막한 2층 목조주택으로 있다. 카피탄 주택의 1층은 당시를 체험할 수 있는 각종 선박 모형과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당시 무역상들과 즐기던 연회실이 긴 테이블과 함께 각종 주류를 진열해두었다.

차이나타운 입구
차이나타운 입구

또, 중앙 게이트에서 남쪽으로 난 골목의 왼편에는 독일인으로서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였던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를 기리는 ‘시볼트 가든’과 당시의 데지마를 1/15 크기의 미니어처로 만든 ‘데지마 속의 데지마’가 있다.(시볼트에 관하여는 2021.11.17. 우레시노온천 참조) 시볼트 가든에는 시볼트에 앞서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였던 캠베르(1651 ~1716), 튄버르흐(1743~1828)를 기리는 기념비도 있는데, 이들은 의술 이외에 저술을 통해서 일본을 유럽에 알린 인물들이다.

중앙 게이트에서 남쪽으로 난 골목의 오른편에는 1863년 스코틀랜드에서 건너와 구라바엔의 주인공이 된 글로버 2세인 구라바 도미사부로(食場富三郎)가 나가사키의 상류층 인사들과 외국인들의 사교장인 '나가사키 내외 클럽' 건물과 1878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데지마 신학교 건물이 있다. 신학교 건물은 현재 ‘나가사키 데지마 사료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당시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영국·네덜란드인 등 서양인들의 생활을 재현한 그림과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

데지마 사료관의 남동쪽으로 나가면, 차이나타운인 신치중화가(新地中華街)가 있다. 신치중화가도 데지마처럼 에도 시대에 중국 무역선 전용창고로 바다를 메워 만든 인공 섬이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주변을 메워 데지마와 함께 육지와 연결했다. 데지마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신지 중화가는 나가사키에키마에(長崎駅前)에서 소호쿠지행 노면전차 1호선을 타고 네 번째 정거장은 차이나타운인 신지 중화가에서 내려도 된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약 250m인 차이나타운은 말 화교들의 집단거주지 신지 중화가 입구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건 중국인 거리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등 사방을 백색, 적색, 흑색으로 화려한 중화문(中華門)이 입구임을 알린다. 신지 중화가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처럼 넓은 지역이어서 입장료가 없다.

미나토공원
미나토공원

이곳 신지 중화가는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 고베의 난긴 차이나타운과 함께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인데, 이곳의 명물은 나가사키 짬뽕과 나가사키 사라 우동이다. 특히 나가사키에서 가장 가는 면발의 사라우동을 자랑하는 ‘소슈린’은 수십 년 동안 나가사키 시민들의 맛집으로 유명하고, ‘이와사키 혼포’가 빵에 동파육을 넣어 만든 카쿠니 만두도 나가사키의 명물로 인기가 높다. 중국요리점, 제과점, 잡화점, 한약방 등 40여 개의 점포에 항상 내외국인들로 붐비는 신지 중화가와 미나토 공원에서는 매년 설과 중추절에는 화교들의 축제가 열린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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