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금강일보] 개항장인 나가사키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나미 야마테(南山手) 언덕에는 서양식 주택 구라바엔(Glover Garden: クラバ園)이 있고, 구라바엔으로 통하는 완만한 비탈길인 오란다 자카 입구에는 일본 최초의 고딕식 건물이자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오우라 성당(大浦天主堂)이 있다.
고딕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성당의 정식명칭은 ‘일본 26 순교자 천주당(日本二十六聖殉?者天主堂)’인데, 오우라 성당은 1933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또,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건물 중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라고 한다.
오우라 성당은 1858년 미일 수호조약 체결 이후 신앙의 자유가 되자, 1865년 프랑스인 신부가 26명의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이 순교한 니시자카(西坂)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지었는데, 약간 가파른 언덕에 세워져서 더욱 높다랗게 보인다.

오우라 성당의 오른쪽으로 난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스코틀랜드 출신 무역상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저택을 비롯하여 영국인 링거(Frederick Ringer), 올트(William John Alt) 주택 등 다른 서양식 주택 9동을 한곳에 모은 구라바엔’이 있다.
그중 1863년에 건축된 글로버 저택, 1868년 링거 주택, 올트 주택 등 3동은 현존 일본 최고(最古)의 서양식 건물이라 하여 ‘중요문화재’로 지정되고, 2015년에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구라바엔은 2021. 12. 9. 참조)
나가사키역 정류장(長崎?前)에서 1호선 노면전차를 타고 츠키마치(築町)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탄 후, 오우라성당역(大浦天主堂下)에서 내려 훼미리마트 건너 좌회전하면 오우라 성당이다.

오우라 성당과 구라바엔으로 통하는 오란다 자카 골목에는 각종 기념품 가게와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성당의 입장료는 300엔인데, 계단을 올라간 성당 매표소에서 매표한 뒤 또다시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정원에는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추대한 100주년을 맞아서 1962년에 세운 ‘26 성인 기념비’와 1981년 교황 바오로 2세의 성당 방문 기념으로 세운 바오로 2세 동상이 있다.
하얀색 성당 외관과 소박하고 조용한 느낌을 주는 벽면을 장식한 십자가와 성당 건물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첨탑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성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일체 금지되었는데,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에서 가져온 유리라고 한다. 성당은 일 년 내내 일본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가톨릭의 성지 순례코스이자 단골 관광코스이다.

예루살렘 성지탈환을 구실로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200년에 걸친 가톨릭과 아랍의 이슬람이 벌인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유럽은 해상강국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포교에 나서자, 전쟁에서 패하여 위상이 추락한 로마교황청도 포교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먼저,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규슈 남부 가고시마현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 일본인들에게 조총을 전달하고 환심을 샀다. 그때까지 칼과 창으로 싸우던 사무라이들은 혁명적인 무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에스파냐의 프란체스코 자비에르 신부(Frantzisko Xavier: 1506~1552)는 인도 고아에서 8년 동안 포교하던 중 포르투갈인 알파르스 선장을 통해서 해적과 밀무역을 하다가 일본에서 도망온 사쓰마(薩摩: さつま) 출신 무사 야지로(やじろ)를 알게 되었다.
1548년 8월 자비에르 신부가 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야지로는 일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이듬해 6월 사비에르 신부는 야지로를 안내인으로 삼아 고아를 출발하여 야지로의 고향인 규슈의 남부 가고시마(鹿牙島)에 도착했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가고시마현의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지 만 6년 뒤에 입국한 자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인 사제 3명, 일본인 3명, 중국인 봉사자 등 7명과 함께 사쓰마반도의 사쓰마 국(薩摩國: さつま)과 오스미반도에 오스미국(大隅: おおすみ)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549년 9월에는 규슈 북쪽인 히라도섬(平戶島)까지 진출했다.
자비에르 신부가 히라도섬의 영주 시마즈 다카히사에게 조총을 선물하니, 다이묘는 크게 기뻐하며 포교를 허용했다. 자비에르 신부 일행이 일본에 머문 2년 4개월 동안 규슈 전 지역은 서양 종교 가톨릭이 널리 전파되었고, 히라도섬은 그 중심이 되었다.
사비에르 신부의 뒤를 이어 1556년 포르투갈인 선교사 ‘가스파르 비레라’, 1570년에는 이탈리아 선교사 ‘오르간치노’, 1579년에 이탈리아의 선교사 ‘알렉산드르 발리니야니’ 등이 입국하여서 규슈 일대는 천주교 신자가 2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그 영향으로 교토(京都)와 아즈치에 난반지(南蠻寺)성당과 신학교까지 설립되었는데, 1585년 토레스 신부가 로마교황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하면서 일본에 신부 300명, 교회 200곳, 신자가 15만 명이라고 보고하여 유럽에 일본의 존재를 처음 알렸다.
그런데, 1582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바쿠후(?臣秀吉)는 1586년 5월 예수회 선교사 총책임자인 포르투갈의 코엘로 신부에게 오사카성 밑에 성당 신축을 허가하면서 중국과 조선 정복에 필요한 대형 선박과 조총을 지원해주면 점령지에 포교와 성당 건축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1587년 천주교 금지명령을 내리고 쇄국정책을 폈는데, 일설로는 1587년 규슈 지방을 정벌하러 왔던 도요토미가 주민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임에 매우 놀라 이들이 반정부 세력이 될까 두려워서 선교사를 추방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임진왜란 발발 2개월 전인 1597년 2월, 도요토미는 에스파냐 선교사 4명, 포르투갈 선교사 1명, 멕시코 선교사 1명과 일본인 신자 20명 등 가톨릭신자 26명을 묶어서 수레에 싣고 멀리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사카이(堺)까지 33일 동안 600㎞ 눈길을 걸어 끌고 다니며 백성들에게 보이고, 나가사키로 돌아와서 니시지카(西坂)에서 처형했다.

예수회,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제 9명과 수도사 몇 명은 화형(火刑), 나머지 일본인 평신도들은 참형(斬刑)을 당했는데, 순교자 중에는 어린이도 3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일본 최초의 천주교 순교 사건은 구한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저지하려고 했던 대원군이 뜻대로 되지 않자, 1866년 남종삼 등 천주교도를 처형했던 병인사옥과 사정이 엇비슷하다.
당시 니시자카에서 처형 광경을 목격하던 서양화를 배운 수도사 사람이 그 광경을 스케치한 '원화대순교도(元和の大殉?圖)'는 로마의 예수회에 전달되어 지금도 로마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나가사키역에서 육교 건너 왼쪽에는 NHK방송 건물이 보이는데, 그 앞에 26 성인 순교지 앞에 순교지 안내판이 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새까만 대리석(烏石)으로 '니시자카(西坂公園)'란 표지석과 함께 잘 다듬어진 공원이 있다. 공원 오른쪽의 완만한 잔디 더미가 26명 순교자의 무덤이고, 순교자 무덤 뒷면에는 26명의 성인을 조각한 벽면이 성벽처럼 우뚝 서 있다.

그 벽면을 돌아가면 1875년에 세운 옛 신학교 건물은 지금은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1865년 오우라 성당을 짓고 헌당한 다음 날, 농민 열다섯 명이 ‘프랑스 절(=오우라 성당)’을 보러왔는데, 그들은 프랑스인 신부에게 신앙고백을 하면서 자신들은 1587년 도요토미의 천주교 금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후 7대 250여 년 동안 은밀하게 예배해온 가톨릭의 후손들임을 밝혀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로마교황 비오 9세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동양의 기적’이라며 크게 감동하고, 1587년에 순교한 서양 신부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성인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