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병길 자전 에세이 ‘빛을 따라간 소년’

[금강일보] 한정된 공간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출연 인원으로 진행되는 연극에서는 주연, 조연 역할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그리 뚜렷이 나뉘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도 비중이 적었던 배우부터 등장하니 공평하기도 하다. 대사와 등장 횟수의 차이일 따름이지 연극 전체의 앙상블을 위해서는 단역 하나에도 소홀할 수 없는 연극의 특성은 공연예술의 민주주의를 보여준다.
이런 구성과 역할 분담이 영화나 TV드라마에서는 조금 바뀐다. 관객들은 지명도가 높고 작품의 흐름을 이끄는 배우 몇몇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나머지 조연, 단역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래서 TV나 스크린에서 이미 낯이 익은 얼굴이라 하더라도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여의치 않다. 코로나 이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나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개성 있는 몇몇 조역들이 조명을 받으면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무심한 대접을 받곤 한다.
탄탄한 연기와 순발력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고 감칠맛을 더해주는 독특한 캐릭터로서의 조연은 그래서 중요하다. 더구나 주연급 배우들이 극심한 인기의 부침으로 명멸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비교적 생명력이 길다. 이제는 스타급 주연배우에게만 쏠리는 관심과 주목의 스펙트럼을 넓혀 내공 있는 조연, 단역배우들의 명품연기에도 관심을 더 보였으면 한다.
충남 청양 출신 권병길 배우는 1969년 연극무대에 선 이후 연극, 영화, TV 여러 장르에서 독특한 연기를 펼쳐왔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얼굴을 보면 이런저런 작품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오르겠지만 이름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얼마 전 그는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펴냈다. 추천의 글을 쓴 유민영 교수는 권병길 배우가 이른바 스타가 아니어서, 은하수 속의 작은 별이어서 그렇다고 얘기한다. 우리나라 근대공연예술사 120여 년을 헤아리는 동안 숱한 스타가 나타났지만 자신이 걸어온 연기활동의 행보를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경우가 아직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기록문화 미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기록이 쌓여 한 분야의 역사로 집적되고 후대에 요긴한 자료와 교본이 되는 까닭에 권병길 배우의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은 그의 연기연보를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공연예술사의 족적을 더듬는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연극무대에서 탄탄한 수련을 쌓은 연기자가 영화나 드라마로 활동을 넓히면 연기수준과 작품완성도가 한층 높아지련만 일부 배우로 쏠리는 현실은 그 세계의 높은 기득권과 특히 광고 스폰서, 제작투자가가 선호하는 배우 중심으로 인물이 만들어지는 상업적인 계산이 깔려있을지 모른다.
소수의 인원을 돌려가며 겹치기 출연하는 제한된 인력 풀을 벗어나 여러 연기 분야에서 나름 수련을 거친 개성 있는 많은 배우들의 활약이 본격화될 때 우리 대중문화의 수준도 한층 높아지리라 생각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