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금강일보] 일본열도 대부분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규슈를 점령하러 왔을 때, 규슈 지역은 가장 남쪽 지역인 사쓰마의 16대 번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사가 도요토미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규슈 남쪽의 사쓰마번 이외의 모든 지역을 빼앗겼다. 도요토미는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 지역을 고니시(小西行長), 중부 구마모토 지역을 가토(加籐淸正), 동부 오이타현 북쪽 부젠국을 구로다(黑田長政) 등에게 분봉하고, 이들을 조선 침략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시마즈 요시히사의 동생인 17대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고, 정유재란 때는 순천왜성에 갇혀있던 고니시를 구출해냈다. 또,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물리친 왜군 지휘관이었다.

16세기까지 세계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중국·조선·베트남 3국뿐이었다. 당시 일본은 도기를 굽는 기술이 없고 토기(土器)만 만드는 수준이어서 우수한 도자기는 금은 같은 보물로 여기고 있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처음에는 일본 토기보다 월등히 우수한 조선 자기에 매혹되어 자기 약탈에 혈안이더니, 정유재란 때는 아예 조선 도공 납치에 나섰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5만~10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는데, 시마즈 요시히로는 철군하면서 전라도 남원에서 박평의(朴平意), 심당길(沈当吉) 등 80여 명의 조선인 도공도 끌고 갔다. 사실 조선인 도공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충청도 공주 출신 이삼평(李參平)이다. 그는 계룡산 동학사 아래에서 도자기를 굽다가 왜군 선봉장 중 한 사람인 가토의 부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붙잡혀서 가라쓰로 끌려갔는데, 이후 규슈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1616년 아리타(有田) 이스미산(泉山)에서 질 좋은 고령토를 발견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흩어져 살던 조선인 도공들이 몰려들면서 깊은 산속에 아리타 마을이 형성되고, 아리타는 일본 도자기의 본산지가 됐다. 이삼평은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는데, 아리타 마을에는 이삼평 기념비와 ‘도공의 신’ 이삼평을 모신 이시바신사도 있다.(이삼평에 대해 자세히는 2021. 10. 5. 아리타 마을 도잔신사 참조)

한편 1598년 12월 17일,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온 도공들이 거센 풍랑을 이기고 가고시마 남쪽 바닷가인 구시기노(串木野) 시마비라(島平) 해변에 상륙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80여 명 중 43명이었다. 그나마 1600년 10월부터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권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の戰い)가 벌어져 사쓰마 번주도 참전하면서 포로들을 돌볼 여유가 없자, 조선인 도공들은 현지 주민과 마찰로 해안가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조선인 도공들은 고령토를 찾아다니다가 대나무숲이 우거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미야마(美山)에 정착했다.

1603년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나 돌아온 시마즈 번주는 박평의를 우두머리로 삼아 도자기 제조를 명령했다. 그 후 번내(藩內)의 여러 곳에서 살던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미야마는 조선인 17개 성씨(李, 朴, 卞, 林, 鄭, 白, 車, 姜, 陳, 崔, 盧, 金, 丁, 河, 朱, 沈)가 모여 사는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1605년 조선인들은 박평의·심당길의 주도로 마을 북서쪽에 단군을 모시는 사당 옥상궁(玉山宮)을 짓고, 매년 음력 8월 15일 제사를 지냈다. 옥상궁은 1907년 일본 신사로 개축되면서 다다야마 신사(玉山神社)라고 했으나, 지금도 단군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1673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미쓰히사(島津忠元)는 도기 제작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영주의 저택을 이곳으로 옮겼다. 또, 도공들을 사무라이급으로 예우했지만,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거나 기모노 착용을 금지하고, 마을 사람들의 외부 유출을 막았다.
187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인 도공들이 모두 평민으로 격하되자, 박평의의 12대손인 박수승(朴壽勝)은 일본인 성씨 도고씨(東郷氏)를 사서 일본인으로 변신하면서 도자기 제작업을 끊었다. 또, 그의 아들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라 하여 본적을 옮기고,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외교관이 되어 독일·소련 대사와 외무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하면서 무력에 의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민족 반역자였다. 그는 2차 대전 후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A급 전범으로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0년 7월 교도소에서 병사했는데, 일본 정부는 그를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봉안하고, 고향 미야마의 생가터에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에는 그가 외무대신 때 입었던 제복과 초상화 등이 걸려있다.

사쓰마야키(薩摩焼)는 시로몬(白薩摩). 구로몬(黒薩摩). 자기(磁器)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시로몬은 국왕이나 귀족용이고, 구로몬은 대중용 도기다. 1867년 파리 제5회 만국박람회 때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와 갈등을 빚던 사쓰마 번주가 독자적으로 출품하면서 바쿠후의 권위가 실추되기 시작했고, 다음 해 메이지 유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아편전쟁(1930~1860)에서 영국·프랑스에 패하여 수출이나 박람회에 출품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어서 12대 심수관은 파리만국박람회에 이어 1872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거대한 ‘금수대화병(錦繡大花甁)'을 출품하여 수상하게 되었다. 1874년 옥광산 도기제작소(훗날 심수관요)를 설립하고,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미야마 마을에는 200여 호 6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100호가량이 조선인 도공의 후손들이다. 마을에는 심수관가(家) 이외에 10여 개의 도요지가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의 심수관 가에 들어서면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라는 현판과 함께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공방이나 도요지는 국내 여느 도요지 모습과 비슷하지만, 목조 2층의 전시관에 전시된 다양한 자기들이 매우 호화롭다. 도자기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투조기법(透彫技法)은 심수관요만의 독자적인 고난도 기법이라고 하는데, 문외한으로서는 그 도기들이 얼마나 예술적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심수관의 낙관이 들어간 자기 한 점에 60만 엔(약 600만 원)씩 가격이 매겨지고, 연간 70억 엔(약 1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고가전략을 펴는 하나의 기업 같다. 또, 심수관의 후손들은 15대 400여 년 동안 청송심씨(靑松沈氏) 성을 간직하고, 또 12대 심수관부터 현재 15대까지 '심수관'이란 이름을 계승해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심수관 도자기’라는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한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 즉, 심수관 가문도 박평의의 후손들처럼 오래전에 일본에 귀화한 일본인으로서 14대 심수관의 일본 이름은 오사코 게이키치(大迫惠吉)이고, 그가 2019년 6월 92세로 죽자 장남이 15대 심수관이 되었는데, 그의 이름도 오사코 가르데루(大迫一輝)이다. 조선인 도공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포로로 처음 일본에 상륙했던 바닷가에 '게이조(慶長: 1598) 3년 겨울, 멀리서 차가운 파도를 넘어 우리들의 개조(開祖)가 이 땅에 상륙했다'라는 조그마한 비석을 세웠다.

오늘날 일본에는 수많은 도자기 생산회사가 있는데, 사쓰마야키도 다테노(竪野)계, 나에시로가와(苗代川)계, 니시모치다(西餅田)계, 류몬지(竜門司)계, 히라사(平佐)계, 다네가시마(種子島)계 등 여섯 계열로 나뉜다. 이것은 그만큼 사쓰마야키의 명성에 편승하려는 도공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