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상무/충남본부장

런던올림픽의 감동과 더불어 금의환향한 선수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이즈음에 상대적으로 존재를 찾기 어려운 트라이애슬론 등 비인기 종목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더욱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노메달은 물론 최하위의 성적을 예견하면서도 선수들은 최고의 스포츠 대제전 올림픽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출전했다는 자부심으로 당당했고, 악 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그래서 비록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메달 스타들의 개선(凱旋)에 가려진 노메달의 귀국길이었지만 참여와 최선에 의의를 둔 그들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웠다.

선수들의 이러한 마음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대가가 없을지라도 최선과 희생을 마다않고, 대가 없는 희생도 진정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그 상황이 다시 닥쳐도 또 그렇게 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나를 위해 그 희생을 축소할 의사는 없다.
최근 자신을 돌보지 않는 부모의 희생과 이로 인해 초래되는 장년층의 준비 안 된 노후를 염려하는 사회 여론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근로현장에서 퇴직을 시작한 베이비붐 세대의 그것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우리의 전통 문화를 교육과 체험을 통해 체득해온 이 세대에게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그러나 서구 문화와 더불어 변화하는 사회 풍습과 그 사회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의 자식 세대에서 이러한 전통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오랜 풍습쯤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상은 지나친 전망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자식으로서의 역할과 부모로서의 역할, 두 가지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더구나 이 베이비붐 세대는 그들 부모 세대와 달리 자식의 효도와 부양 의무 등에 집착하지 않는 경향이 커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수명이 연장되면서 당장 몇십 년 동안 경험하게 될 퇴직 후의 준비되지 않은 노후 생활은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부모와 자식된 도리를 다하느라 내 노후를 되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이 의무를 채 끝내기도 전에 이들은 직장에서 물러나야 되며, 퇴직 전에 가까스로 두 의무를 마무리하더라도 더 이상 자신을 위해 투자를 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딱한 형편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두 신분의 굴레에서 당장의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퇴직 후 노후생활에 대비하지 않으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계와 충고를 비웃는 것이 아니며, 대비하지 못한 노후의 참상을 예측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된 도리’와 ‘노후준비’라는 두 가지 의무 중에서 우선해야 할 하나를 기꺼이 선택, 행동할 뿐이다. 이 땅의 수많은 기러기아빠도 마찬가지다. 외국 유학으로 교육비 마련에 허리가 휜다. 자녀 뒷바라지에 부인마저도 함께 타지에 보내고 나니 생활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교육을 마친 뒤 자녀가 귀국해 부모를 모시고, 그 희생을 보상한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자녀의 미래를 위해 내가 자청한 길이기에 묵묵히 내가 만든 길을 걷고 있다.

아무런 준비 없는 노후는 오히려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식에게 기댈 생각이 아니라면 적절한 대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처지의 베이비붐 세대로서, 제발 자신의 노후 대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러나 미래가 아무리 두려워도 ‘부모를 통해 내가 태어났으며, 내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의 의무를 멈출 수 없다’는 천륜(天倫)에 기초한 그 의지를 베이비붐 세대가 쉬 내려놓을 것 같지 않다. 훗날 자녀들이 이를 본받아 다시 ‘부모바보’ ‘자식바보’가 되어준다면 그저 감사할 뿐일 게다. 그들의 부모가 그래왔던 것처럼 지극한 내리사랑의 베품을 사리지 않는 베이비붐 세대의 희생은 일면 무모해보이지만 무척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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