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복어 동상

1894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진 지 8개월 만인 1895년 4월 17일 청일 양국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은 전승국 일본이 패전국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을 불러서 맺은 강화조약이다. 조약체결 이후 조선의 종주국이던 청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 세력이 밀려오면서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는 첫발을 딛게 되었다. 시모노세키의 관문인 시모노세키항과 대표적인 어시장인 가라토시장 그리고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세워진 해안에서 도로 건너편에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이 있고, 아카마 신궁 왼편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청일전쟁 강화기념관(日淸講和紀念館)이 있다.(자세히는 2022. 5. 25. 아카마 신궁 참조)

총리대신 이토(왼쪽)와 외무대신 무쓰 동상.
총리대신 이토(왼쪽)와 외무대신 무쓰 동상.

19세기 말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눈과 귀를 막고 오로지 청에 의지하던 우둔한 고종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진압 능력이 없어서 청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군이 조선에 출동하였으나, 일본은 갑신정변 후 청과 맺은 1885년 톈진조약(天津條約) 위반이라며, 조선에 출병하여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앞바다에서 포격전으로 시작한 청일전쟁은 아시아 최고라는 청의 북양함대의 함정이 허망하게 침몰당하고, 뤼순 및 류궁다오(劉公島) 기지도 점령됐다. 청 해군의 위용을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이화원 복원에 전부 써버려서 포탄이 단 세 발밖에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군이 산해관(山海關)까지 진출하여 베이징 점령이 시간문제가 되자, 청은 미국·영국·러시아 등에 협상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청일전쟁을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그리고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 한다. 결국 1895년 3월 19일 이홍장이 일본에 직접 굴욕적인 강화협상을 요청했다.

춘범루 본관과 별관
춘범루 본관과 별관

이홍장은 화교들이 많이 사는 규슈의 나가사키(長崎)를 회담장으로 원했으나, 1885년 일본 초대 총리대신이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중간지점이자 자신의 고향인 시모노세키를 회담장소로 정했다. 1895년 3월 이홍장이 텐진에서 독일 선박을 타고 규슈의 모지(門司)에 도착한 것은 1883년 김옥균 등 급진개혁파들이 주도하여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1885년 이홍장이 일본의 이토를 텐진으로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10년 동안 뒤바뀐 두 나라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그렇지만, 시모노세키에는 국제회의를 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고민하던 이토는 생각 끝에 자신의 단골 복어요릿집 춘범루(春帆樓)로 결정했다.

강화회담장 테이블
강화회담장 테이블

춘범루는 아카마 신궁 옆에 있던 사찰이 메이지 유신 후 불교 탄압으로 헐리자, 젊은 안과의사가 그곳에 아담한 건물을 짓고 병원을 개업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의사가 죽자, 이토는 가난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에 먹었던 복어 맛을 잊지 못하고 미망인을 설득해서 병원을 복어요리점으로 개장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일본 제1호 복요리점 허가를 내주고, 춘범루라는 상호까지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토가 청의 이홍장을 불러 춘범루에서 강화조약을 맺은 후, 그 장소를 기념관으로 지정하여 일반에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약간 비탈진 기슭에 있는 춘범루 본관은 지금도 값비싼 전통 료칸(傳統旅館) 겸 복어요리전문점으로서 일본 천황이 시모노세키에 오면 이곳에 묵는다고 한다. 본관의 오른쪽 기와집으로 지은 별관이 강화회담장인데, 본관과 별관 사이에는 총리대신 이토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강화회담 그림
강화회담 그림

시모노세키는 전국 복어(鰒魚: ふぐ) 어획량의 80%가 넘을 만큼 유명하여 복어를 시(市)의 심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가라토시장은 물론 하치만구 신사(龜山八幡宮)에 세계 최대의 복어 상을 세웠다. 간몬해협의 해저터널 입구에도 커다란 복어를 그리는 등 시내 곳곳에 복어 조형물이 많다.(복어에 대하여는 2022. 5. 25. 시모노세키의 개요 참조)

복어의 일본어 '후쿠'는 ‘복 복(福)’자와 발음이 같아서 복어를 먹으면, 복이 들어온다는 속설로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복요리가 발달했다. 복어는 하돈(河豚)이라고도 하는데, 하돈은 중국 문헌에도 나타나고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는 돈어(豚魚)라고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복어가 적을 만나면 배를 크게 부풀려서 겁을 주어서 뚱뚱한 돼지를 닮았고, 또 부풀어 오른 배에서 ‘꿀꿀꿀’ 하고 돼지 소리를 내어 ‘강의 돼지’ 또는 ‘돼지 생선’이란 의미이다.

니홍장 길(샛길)
니홍장 길(샛길)

이홍장은 타고 온 독일 선박(船中泊)을 숙소로 삼고 회담에 나서려고 했으나, 이토는 73세 고령의 이홍장을 배려한다고 춘범루 인근의 인조지(引接寺)라는 절을 청국 대표단의 숙소로 제공했다. 인조지는 이 지역의 영주였던 모리(毛利) 가문의 개인 사찰로서 임진왜란 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숙소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일본 측 대표는 총리대신 이토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청국은 전권대신 이홍장과 그의 양자 이징팡(李經芳)이었다. 이징팡은 주일 공사를 역임해서 일본어가 능통했다. 청일 양국 대표는 수차 담판을 벌였지만, 전세가 유리한 일본이 양보하지 않아 좀체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홍장이 입국 후 나흘째 되던 3월 24일, 이홍장이 가마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에 26세 난 일본 극우파 청년 고야마 로쿠노스케(小山豊太郎)가 이홍장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이홍장의 왼쪽 눈 아래에 박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은 4년 전인 1891년 5월 방일 중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교토 인근의 오쓰(大津)에서 경호 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았던 악몽이 떠올라 메이지 천황도 놀라서 전의(殿醫)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 조건이 너무 완강해서 회담에 진척이 없던 청국은 하늘이 준 기회로 여겼고, 또 일본은 세계 톱뉴스가 되어 청국을 동정하는 서구열강의 개입을 우려하여 청의 요구를 대폭 받아들여 회담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4월 17일 일본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작성한 조약 초안을 기초로 하여 이토와 이홍장 사이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국 지위 배제,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 등 할양, 전쟁배상금 2억 량 지불, 열강과 동등한 최혜국 대우 등 단 5개 조문이었다.

애초 일본은 청에 일본 정부의 4년 예산 규모인 3억 량의 배상금과 랴오둥반도와 타이완의 할양 등을 요구했으나, 노회한 이홍장은 불평등조약 내용을 제3국에 널리 알렸다. 그러자 일본은 배상금을 2억 냥으로 줄였지만, 이 금액도 청의 2년분 세수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또, 일본이 할양을 요구한 랴오둥반도는 베이징과 인접한 지역으로서 일본이 중국에 진출할 교두보로 삼으려고 했으나,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조약체결 6일만인 4월 23일에 철회하고, 그 대신 일본은 청으로부터 3천만 냥을 추가 배상금으로 받기로 했다. 삼국간섭은 10년 후 1904년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기념관에는 강화회담 당시 두 나라 대표가 앉았던 탁자와 의자를 재현해 놓고, 각각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 하지만,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회담이었는데도 조선 대표나 관계자의 흔적은 없다. 또, 기념관의 삼면 벽에는 당시의 조약 전문과 이홍장이 머물렀던 인조지의 사진, 이홍장과 이토의 글씨 등이 걸려 있다.

이홍장 일행의 숙소인 인조지부터 춘범루까지 약 300m 정도의 샛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데, 이홍장이 극우파의 습격을 받은 후 회담장을 다녔던 길이라고 한다. 이 샛길에는 '이홍장 길(李鴻章道)'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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