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기원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고, 또 일본의 초기 건국지역에 대하여도 설이 불분명하다. 중국 서진(西晉) 때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왜는 BC 1세기경 100여 개의 읍락국가가 형성되었다가 철기가 보급되면서 2세기 중엽 야마타이국(耶馬臺國) 등 30여 개로 변했다.

일본은 3세기경에 지금의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최초로 오키마(大王)을 중심으로 호족 연합정권인 야마토정권(大和朝廷: 300~593)을 세웠는데, 호족들에 의해서 오키마가 옹립되거나 살해되는 등 왕권이 미약한 존재였다, 야마토정권은 거대한 고분을 남긴 고분시대(古墳時代)를 거쳐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발전한 아스카문화(飛鳥文化)가 발전했는데, 이 시기에 특히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헌법을 제정하여 천황의 권위를 굳건히 하는 한편 대륙의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아스카문화의 주역이었다. 그렇지만, 야마토정권의 발상지에 관하여는 규슈 설(九州說)과 나라 설(奈良說) 등 다양한 학설이 있고, 최근에는 대륙에서 기마인들이 4세기 초 바다 건너 규슈에서 나라를 세운 뒤, 그 후 간사이(関西) 지방으로 북진하여 국가를 형성했다고 하는 기마민족설도 유력하다.(한반도에서 건너간 가야인의 일본 건국설에 관하여는 2022. 3. 23. 가라쿠니다케 참조)

720년 신화(神話) 시대부터 41대 지토 천황(持統天皇: 재위 645~702)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모두 30권으로 되었는데, 그중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642 ~645, 655~661)은 660년 7월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百濟國 窮來歸我)
본국(本國=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以本邦喪亂)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靡依靡告)'라고 한탄했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의 끈질긴 투쟁에 663년 일본군과의 연합작전마저 금강하구 백강 전투에서 패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서기의 덴지 천황(天智天皇) 2년(663) 기사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즉, 일본서기는 백제 멸망 후 바다를 건너온 백제계 왕자인 도네리친왕(舍人親王) 등이 썼는데, 백제와 왜와의 관계가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주요 지역에 왕족을 파견한 22담로(擔魯) 중의 하나였는지, 일본서기가 말한 임나일본부의 종주국이었을지는 판단에 맡긴다. 다만, 일본서기의 편자들이 조국을 멸망시킨 신라 나아가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에 대해서 어찌 원망스럽지 않을까? 그래서 백제를 계승한 일본국이 신라보다 더 위대한 국가라는 자존심을 고양하기 위하여 그때까지 왜(倭)라고 칭하던 국호를 버리고, 일본국(日本國)이라는 새 국명을 붙이고, 적국 신라를 증오하는 기사를 창조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일본서기가 670년 41대 지토천황(持統天皇: 690~697) 때부터 덴노(天皇) 칭호를 사용한 것도 중국과 대등한 제국(帝國)으로 자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백성들은 천황을 신(神)으로 받들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 조에도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이라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가 뜨는 곳에 가까워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은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으로 혼슈(本州)· 시코쿠(四国)· 규슈(福岡) 등 4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었는데, 혼슈의 중심부에 가장 높이 솟은 후지산(富士山: 3776m)을 기준하여 동쪽을 간동(関東), 서쪽을 간사이(関西)라고 한다. 지토 천황의 이복동생이자 덴지 천황의 넷째 딸인 43대 겐메이 천황(元明: 707~715)은 아스카 지방에서는 토착 세력 때문에 왕권 강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710년 수도를 지금의 나라(奈良)인 헤이조쿄로 옮겼다. 그 후 794년 간무 천황(桓武: 781~806)이 수도를 다시 지금의 교토(京都)인 헤이안쿄로 옮길 때까지 84년간을 나라 시대(奈良時代 : 710~794)라고 하며, 이 시기에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천황이 권력을 장악한 중앙집권 국가로서 율령국가이자 불교문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간무 천황이 국력이 강화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당의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반듯한 계획도시로 건설한 교토로 천도한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 ~1199)가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열 때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 ~1185)라고 한다.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권을 되찾을 때까지 천황이 거주하던 교토(京都) 일대를 ‘왕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의 키나이(畿内)라고 불렀는데, 키나이란 현대식 표현으로는 수도권 개념이었다. 키나이 지역을 둘러싼 주요 간선도로에 관문을 세웠으며, 교토의 동쪽 스즈카관(鈴鹿関), 후와관(不破関), 아라치관(愛発関) 등 3개의 관문을 산노세키(三関)라고 했다. 산노세키를 중심으로 서쪽인 교토 쪽이 간사이 지역이고, 관문의 동쪽 지역이 간토(関東) 지역이다. 결국 간사이는 근기 지방이 되지만, 간토와 간사이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아서 두 지방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을 주고쿠(中部)라고 한다.

6세기 아스카시대로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도쿄 천도할 때까지 명실공히 일본의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지이던 간사이 지방은 오늘날에도 서일본의 핵심이자, 일본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이다. 간사이 여행에서는 먼저 일본 고대문화가 시작된 야마토와 아스카문화가 있는 나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나라에서는 도쿄, 교토에 이어 일본 3대 국립박물관인 나라 박물관을 비롯하여 신라가 삼국통일 후 불국사를 짓던 시기(761)와 비슷한 745년 인도 승려 보디세나가 지었다고 하는 도다이지(東大寺), 그리고 나라에서 기차로 30분을, 다시 버스로 10여 분을 타고 가야 볼 수 있는 호류사(法隆寺)는 아스카문화의 절정이어서 일본의 국보와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190종 3000여 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워낙 오지여서 패키지여행에서는 빼놓기도 하는 호류사에는 한반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의 문화를 많이 엿볼 수 있다. 또, 멀리 효고현의 히메지시에 있는 하얀 백조와 같이 아름다운 UNESCO 세계문화유산인 히메지성(白鷺城)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한편, 간사이 최대도시인 오사카에서는 오사카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오사카성(大坂城)과 오사카의 오늘을 볼 수 있는 도톤보리(道鈍堀)와 우메다(梅田)가 있다. 12세기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의 도읍인 교토에서는 교토 국립박물관, 임진왜란 때 조선인을 죽인 증거로 잘라간 귀(耳) 무덤과 천황권과 별개로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하고 현지 숙소처럼 운영되던 니조성(二條城)과 킨카쿠지(金閣寺)를 비롯하여 긴카쿠지(銀閣寺), 료안지(龍安寺),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 선종(禪宗) 사찰이 우리는 나말여초부터 교종과 갈라진 선종 사찰과의 차이점을 엿보게 해준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