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오사카에서 서쪽으로 약 33㎞ 떨어진 나라(奈良)는 2세기경부터 약 800년 동안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문화를 꽃피운 야마도 정권(大和朝廷)이 있던 곳이다. 백제계 도래인들이 가야계 도래인들이 세운 야마도 정권을 물리치고 아스카문화를 이룩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일본인들은 이것을 믿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백제 13대 근초고왕(346~375) 때 이곳까지 진출하여 세운 정권을 일본인들은 “백제(百濟)”라고 쓰면서도 왜 구다라(くたら)라고 읽는지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나라'라는 지명을 한자로 '奈良'이라고 쓰면서도 왜 '나라'라고 읽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지, 모른 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라에는 불교에 심취한 45대 천황 쇼무(聖武: 701~756)가 세운 세계 최대의 비로자나불을 모신 사찰이자,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인 도다이지(東大寺)가 있다. 쇼무 천황은 죽은 황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긴쇼지(金鐘寺)를 창건했는데, 흉작이나 천연두 같은 역병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잦은 반란으로 수도를 네 번이나 옮길 정도로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743년 긴쇼지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불사를 일으켰다. 도다이지요록(東大寺要錄)에 의하면, 733년 백제계 승려 양변(良弁)이 긴쇼지를 세운 곳에 도다이지를 세웠는데, 도다이지란 동쪽에서 가장 큰 사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5년 동안 7개의 가람과 16m나 되는 청동좌불 조성 불사에는 고구려 출신 고려복신(高麗福信)과 신라 출신 저명부백세(狙名部百世)가 총책임자였다. 목수 5만 1590명, 토목 인부 166만 5071명, 주물사 37만 2075명, 주조 인부 51만 4902명 등 연인원이 260만 명을 넘었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5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도다이지와 대불 건립 불사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산이 투입된 국가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쇼무 천황의 간절한 염원과 달리 불사 건립은 순탄하지 않았다. 주불인 비로자나불은 6차례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749년에야 완성되었고, 불상 조성에 필요한 청동과 금을 마련하느라 나라 재정이 파탄에 빠지기도 했다. 16m나 되는 대불을 도금하는 데 많은 황금이 필요했는데, 의자왕의 4대손인 왕경복(王敬福)이 금 900냥(약 34㎏)을 보시했다. 758년 도다이지 낙성식 때는 일본은 물론 신라, 발해, 당의 승려뿐만 아니라 인도, 베트남 등 동남아 승려들까지 초청한 거대한 행사였는데, 이것은 552년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지 200년 만의 일로서 신라가 삼국통일 후 융성하던 751년 불국사를 건립하던 시기와 비슷하다. 다만, 607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세운 호류지(法隆寺)는 백제 양식이 완연하지만, 130여 년 뒤의 도다이지는 토착화된 일본 사찰의 모습이다.(호류지는 2022. 6. 27. 나라 호류지 참조)

이렇게 완공된 도다이지는 855년 대지진과 1180년 시게하라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했지만, 1567년 미요시·마츠나가의 난으로 소실되어 현재의 절집은 1692년 세 번째 재건한 것으로서 원래의 규모보다 크게 작아졌다. 도다이지는 본당인 대불전, 난다이몬(南大門), 정창원, 이월당, 청동팔각 등 8개의 국보를 보유하고 있다.

나라 시내에서 나라현청과 나라 국립박물관, 사슴공원과 흥복사 앞을 따라가다가 넓은 네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건너면 도다이지 입구다. 도다이지를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1998년 UNESCO 세계문화유산 안내판이 있다. 울창한 소나무숲 길을 들어서면 곳곳에 방생하는 사슴들이 즐비한데, 사슴들은 사람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먹이를 달라고 졸졸 따라다닌다. 곳곳에 일본어와 영어, 한글로 사슴이 들이받거나 공격 가능성을 경고하는 안내문이 있다.

일본 특유의 붉은색 도리이가 세워진 공간을 지나면 우리네 전통 사찰의 일주문 격인 정문에 화엄종 본산답게 대화엄사(大華巖寺)라고 쓴 큼지막한 현판이 걸린 전각이 난다이몬(南大門)인데, 단청하지 않은 난다이몬의 모습이 숙연하게 한다. 그 양쪽에는 우리네 금강문 좌우에 있는 금강역사가 있다. 난다이몬을 지나면 작은 중문이 있고, 중문 왼편에 매표소가 있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사찰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 것과 달리 경내에서도 특별한 공간을 입장할 때만 요금을 받는다. 어른 500엔, 어린이 300엔인데, 박물관을 포함한 통합입장권은 어른 800엔, 어린이 400엔이다. 중문에서 왼쪽으로 동대사 문화센터와 박물관이 있다.
도다이지의 대불전은 쇼군의 투구 같은 외관이다. 이것은 오사카성, 히메지 성, 금각사 등 간사이 지방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대 일본 건축양식으로서 이것을 본떠 쇼군들의 투구를 만든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대불전 지붕 양쪽 끄트머리에 장식한 치미(雉尾)는 순금으로서 한쪽 치미의 가격만 2억 엔이 넘는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응신불(應身佛)로 삼는데, 도다이지의 주불은 비로나자불(毘盧遮那佛)이다. 비로자나불은 광명불로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가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梵語)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한 것이다. 도다이지는 현재 일본 화엄종의 본찰이다.
그런데, 원래 조성했던 비로자나불은 소실되어서 현재는 당초의 3분의 1로 축소된 16m의 좌불은 얼굴 길이 5m, 눈의 좌우 길이 1m, 코의 높이 50cm, 귀의 길이 2m 60cm, 엄지손가락 길이 1m 60cm나 되며, 구리와 주석이 400t, 금 60㎏, 수은 300㎏이 들어갔다고 한다. 중앙의 비로자나불 좌불이 약간 앞으로 나와서 좌정하고, 왼편에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과 오른편의 여의륜관음상(如意輪觀音)은 약간 뒤로 배치되었다. 두 보살상은 모두 목조이지만, 황금색으로 칠했다. 이렇게 거대한 불상이 안치된 대불전은 아파트 16층 높이인 47.5m이고, 너비 57m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겉에서 볼 때는 2층 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우리네 사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층이다.

비로자나불과 허공장보살이 안치된 대불전 뒤편에 우리네 사찰의 사천왕문에서 불법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 중 하나인 광목대왕(서방)과 다문천왕(북방)을 배치한 것도 낯설다. 눈이 왕방울처럼 부리부리한 광목대왕은 붓을 들고 있고,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는 것도 우리네 사천왕의 모습과 다르다. 그 옆에는 불타다 남은 원래의 청동 좌불의 손바닥 하나가 있는데, 그 손바닥 위에는 어른 16명이 올라설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소실되기 전 대불전의 모형을 목각으로 미니어처처럼 만들어서 비교하도록 대비시키고 있다.

대불전의 맨 오른쪽 구석의 커다란 나무 기둥 아래에 어린아이 한 명이 가까스로 통과할 만한 구멍 한 개가 뚫려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평생 무병장수한다는 속설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녀들에게 이 구멍을 통과시키려고 길게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가로 30㎝, 세로 37㎝, 깊이 108㎝인 나무구멍은 비로자나불 좌불의 콧구멍과 크기가 같다고 한다. 이렇게 극히 사소한(?) 점에서도 우리네 전통 사찰이 너무 권위적인 대웅전이나 미륵전의 본존을 관리하는 방식과 큰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또, 대불전 입구 오른쪽에는 일본 특유의 붉은색 천을 두른 빈두루존자(貧頭盧尊者) 목조 나한상이 있는데, 환자가 자신의 아픈 부위와 목조불의 똑같은 곳을 문지르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다리 쪽은 반질반질하다. 언제 누가 빨간 망토를 씌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은 우스꽝스럽다.
대불전 뒤의 담장을 지나면 매년 음력 2월에 이곳에서 슈니에(修二會)가 열리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 이월당(二月堂)이 있다. 현재의 이월당은 1667년 화재로 다시 지은 것이며, 이월당 앞에는 이월당 재건에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을 대리석 말뚝에 새겨두었다. 그런데, 신라 향촌장적(鄕村帳籍)이 발견된 정창원(正倉院)의 내부를 둘러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 아쉽다. 정창원 유물은 매년 가을에 나라 국립박물관에서 특별전시를 하는데, 국내외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올 정도이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