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현병근 등 가문 빛내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로 손꼽힌 현상벽(顯尙璧, 자는 언명(彦明), 호는 관봉 冠峰)이 관봉문답(冠峰問答), 관봉유고(冠峰遺稿)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벼슬이 장릉 참봉(종9품),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왕세자(王世子)를 모시고 경호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으로, 1392년(태조1) 세자관속(世子官屬)을 설치해 세자를 위한 강학(講學)과 시위(侍衛) 임무를 함께 맡겼으며, 세마는 정9품)를 지냈고, 강문 8학사의 한사람으로 예론(禮論)에 정통했다.

조선 후기 학자로 시(詩)에 뛰어났으며, 성리학에 일가를 이뤄,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다고 주장했다.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 발전시켰다. 현상벽의 묘는 충남 예산읍 관작리에 있다.
또한 학자 현약호(玄若昊)가 유명했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현덕윤(玄德潤)과 현재덕(玄在德) 등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한말에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현병근(玄炳瑾)과 현익철(玄益哲)이 가문을 빛냈다.

또한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1943년 3월 21일, 호는 빙허(憑虛))은 한국의 소설가, 언론인으로 한국 사실주의 단편소설의 기틀을 다진 작가이다.
1900년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東京)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上海)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개벽지’에 단편소설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백조(白潮)동인으로서 ‘타락자(墮落者)’,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발표함으로써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사실주의(寫實主義)를 개척한 작가가 됐다.
김동인(金東仁)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됐다. 시대일보와 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했고, 1935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장기말살사건(日章旗抹殺事件)으로 1년간 복역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작품에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의 죽음, 지새는 안개, 까막잡기,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 정신병원장 등 단편이 있고, 적도(赤道), 무영탑(無影塔), 흑치상지(黑齒常之), 미완(未完) 등 장편이 있다.
이밖에 현상윤(玄相允,1893~?)은 평북 정주(定州) 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교사학과를 졸업하고, 1918년 중앙(中央)학교 교사가 됐다.
민족대표 33인 외에 3·1운동의 계획과 추진에 중요한 구실을 한 1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해 2년간 옥고를 겪었다. 출옥하자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1922년 이상재를 대표로 하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 부장을 지내고, 1946년 보성(普成)전문학교 교장(현 고려대)에 취임했다가,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으로 승격됨에 따라 초대 총장이 됐으나,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가 있다.
현제명(玄濟明:1902년∼1960년, 음악가, 교육자, 호는 현석(玄石), 대구 출생)은 기독교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校)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특히, 성악과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수업에 열중했다.

1923년에 졸업해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음악교사를 역임한 뒤, 1925년 미국으로 가 시카고 무디성경학(Moody Bible School)에 입학했다가, 건음악학교(Gunn Music School)로 옮겨 1년간 수학한 뒤 귀국,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9년의 귀국독창회를 비롯해 1930년대에 주도적인 성악가로서 활동해 빅타와 컬럼비아 레코드 등에 자작 가곡과 이탈리아 가곡 등을 취입했다.
1933년 홍난파와 함께 한국 최초의 작곡발표회를 가졌으며, 1932년과 1945년에 작곡집을 발간했다. 195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춘향전>을 작곡·지휘하고, 1958년에는 가극 ‘왕자 호동’을 작곡했다. 1933년에는 조선음악가협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고, 1942년에 후생악단(厚生樂團)을 조직했으며, 1945년에는 최초의 본격적인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해 1948년까지 운영했다. 1945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했고, 1953년 음악인들을 규합해 한국음악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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