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교토는 794년 간무 천황(桓武: 781~806)이 나라(奈良)에서 천도한 이후 1868년 왕정복고로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길 때까지 11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간무 천황은 중국 당의 장안성을 본떠서 23㎢ 면적에 주작대로를 만들고, 그 좌우로 똑같은 크기의 1200개 구역으로 나눈 계획도시였다.
그러나 가마쿠라. 무로 마치·에도(도쿄) 바쿠후(幕府) 시대에는 교토는 천황이 거주하는 황도였고, 정치의 중심은 바쿠후가 머물던 가마쿠라, 오사카, 에도에 있었다. 그나마 황궁조차 도쿄로 옮겨간 이후 도시는 급격하게 황폐해졌다. 천년고도인 우리의 경주에도 황궁은 사라지고 궁터만 남았듯이 황궁도 사라졌다.

1895년 헤이안쿄 천도 1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를 추진하면서 교토의 역사적 전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황궁 건설 계획도 추진되었다. 애초에는 황궁 터에 복원할 계획이었지만, 황궁 터 매입에 실패하자 교토 교외의 오카자키에 실제 크기의 2/3 규모로 황궁을 복원했다.
박람회가 끝난 뒤 이곳에 교토로 천도한 간무 천황을 모시는 신사로 바꾼 것이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인데, 그 후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 최초의 천황인 진무(神武)부터 1940년 교토에서의 마지막 천황인 121대 고메이(孝明)까지를 제신으로 추가했다.
헤이안 신궁에서는 매년 10월에 대대적인 축제(まつり)를 벌이며, 교토의 3대 축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1976년 1월 본전과 내배전(內拜殿) 등 9동이 방화로 소실되자, 정부의 보조금이 없이 전 국민의 성금으로 3년만인 1979년에 재건했다.
이렇게 헤이안 시대의 양식으로 지었다고 하지만, 불과 50년도 되지 않은 건물들이어서 테마공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은 2010년 정전인 대극전(大極殿) 등 6동을 중요문화재로 지정했고, 또 참배 길에 있는 높이 24.2m의 거대한 오오토리이(大鳥居)도 등록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헤이안 신궁은 JR 교토역에서 시내버스 5번을 타고 교토회관 미술관 앞에서 내리면 지척이고, 지하철 도우자이센 히가시야마 역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자동차로 갈 때는 교토 동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서 산죠도오리를 서쪽으로 20분쯤 가면, 오카자키공원 지하 주차장이 있다. 공원 지하 주차장은 500대가 주차할 수 있고, 주차요금은 시간당 500엔이다.

헤이안 신궁의 입장료는 무료이다. 하지만, 정원을 관람하려면 성인 600엔, 학생 3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사실 우리네 사찰 대부분이 국립공원 지역 안에 있다고 사찰 관람객이 아닌 등산객에게까지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횡포를 생각하면, 신사와 사찰의 입장료를 기본적으로 무료로 하고 경내의 특별한 장소를 관람할 때만 입장료를 받는 조치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전통적인 고유의 토속신과 국가나 지역에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을 봉안하는 신사(神社)가 발달했는데, 초기에는 우리의 서낭당처럼 숲이나 동굴, 바위 등 신성한 장소를 신사로 삼고 의식을 거행할 때만 그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불교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는 영향을 받아서 신사도 독립한 건물로 짓기 시작했지만, 사찰과 신사의 구분은 엄격하지 않았다. 비교적 근래인 에도시대부터 사찰과 신사가 분리되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신사의 입구에만 도리이가 있다는 점이다.
도리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전령이라고 믿는 일본의 전통 신앙으로서 우리의 삼한시대에 신앙이던 솟대(蘇塗)와 같은 역할을 한다.(일본 신사에 관해서는 2020. 5. 20. 아사쿠사 센소지 참조)

신사는 천황이나 그 시조를 모시는 제단인 신궁(神宮)과 엄격하게 구별되고, 만일 신사를 신궁으로 명칭을 변경할 때는 천황의 칙허가 있어야 했지만, 2차대전 이후 제정된 헌법에서 정교분리로 지금은 구별이 엄격하지 않다.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도 신사의 하나로서 입구의 거대한 붉은색 도리이가 시선을 잡는데, 헤이안 신궁은 전체 약 2만 평 대지 중 헤이안 신궁이 약 1만 평이고, 정원이 약 1만 평이다. 도리이를 지나면 신궁의 정문인 응천문(應天門)이다.
응천문을 들어서면 넓은 경내의 한중간에 초록색 도자기 기와로 올린 녹유(綠釉) 지붕과 진한 주황색 건물 기둥이 대극전(大極殿)이다.
대극전은 애초 황궁인 조당원(朝堂院) 규모의 5/8로 축소 재현했다고 하는데, 왼쪽의 정원 입구에 백호루(白虎樓), 오른쪽에는 창룡루(蒼龍樓)를 배치했다. 대극전 뒤로 돌아가면 조당원을 본뜬 배전(拜殿이 있는데, 헤이안 신궁은 천황을 제신으로 모신 참배 시설이라 하여 내부의 사진 촬영을 일체 금지하고 있다.

신궁을 에워싼 정원을 신원(神苑)이라고 한다. 신원은 천황을 신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이 ‘신의 동산’으로 인식하는 공간으로서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식 정원 조경가인 오가와 지베에(小川治兵衛: 1860~1933)가 20년에 걸쳐 만들었다. 신원은 현재 일본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식 정원은 거닐면서 감상하는 회유식(回遊式)과 정자나 한 지점에서 바라보는 감상식(感想式)의 두 종류가 있는데, 교토 용안지(龍安寺)의 석정(石庭)이 감상식이라고 한다면, 헤이안 신궁의 신원은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이다.
신원 관람은 대극전의 왼쪽에 있는 백호루 앞이 신원 입구이며, 남신원(南神苑)→ 서신원→ 중신원 →동신원 순서로 관람로를 따라 대극전 오른쪽의 창룡루 옆이 출구다.
남신원은 귀족들이 와가(和歌)를 즐기며 연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설계된 ‘헤이안의 정원’으로 불리는 작은 연못과 조경이 중심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봄 다홍색 수양벚나무, 초여름에는 철쭉, 가을에는 싸리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남신원 바로 위의 서신원(西神苑)에는 남신원보다 약간 큰 연못 뱍코지(白虎池)가 있는데, 이곳에는 5월에는 꽃창포가 피고, 남서쪽의 나무숲에는 차실(茶室) 쵸우신테이(澄心亭)가 있어서 정원이라기보다 조용한 숲속 같은 느낌이다.

작은 숲을 지난 중신원(中神苑)은 헤이안 신궁의 오른편 구석에 해당하는데, 이곳에는 작은 돌다리와 호수 안의 미니 섬에는 미니 탑도 있다.
서신원의 나무숲에서 시작되는 중신원의 소우류우 연못(蒼龍池) 위에는 교토 시내의 유명한 산죠오오바시(三条大橋)와 고죠오오바시(五条大橋)에 사용되었던 주석으로 만든 가류우쿄우(臥龍橋)라는 징검다리도 있는데, 가류우쿄우는 ‘용의 등에 올라서 연못에 비치는 하늘의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다리'라는 뜻이다.

1910년에 조성된 동신원(東神苑)은 헤이안 신궁의 신원 중 가장 넓은 세이호우 연못(栖鳳池)는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의미다. 귀족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것을 재현하려고 만든 세이호우지를 건너는 나무다리 중간에 태평각(泰平閣)이란 정자를 짓고, 정자 꼭대기에는 봉황을 세웠다.

연못 위를 건너는 나무다리 위에 지붕을 만든 것이 마치 북경의 이화원, 스위스 루체른의 가펠교를 떠오르게 한다(2020.1.29. 이화원 참조). 연못에서 창룡루로 나오는 지점의 상미관(尙美館) 등 2개의 건물이 동신원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해주는데, 이런 아름다움 때문에 태평각 일대는 신혼부부들의 웨딩사진 촬영장소로도 인기여서 신궁에서 결혼식을 제공하는 사무실 건물도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