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순으로) 에펠탑에서 본 파리 센강, 알프스 몽블랑, 찰츠캄마굿 선착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정원.

오후 1시 15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여객기는 1시간쯤 후 중국 북경 상공을 넘더니, 3시간쯤 지난 4시 5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상공을 날았다. 객실에서 조종석 쪽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비친 여객기의 상황은 시속 785㎞, 비행고도 1만 780m, 바깥 기온은 -78도. '이때 여객기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우리는 지상에 추락해서 죽기 전에 고스란히 동태가 되어서 죽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와락 소름이 끼쳤다. 얼마 후 다시 창밖을 내다보니, 황량한 모래 먼지만 보이는 것이 지도책에서만 보던 고비사막인 것 같았다. 이내 우랄산맥을 넘을 때 여객기가 심한 난기류에 허덕이는 모습이 가파른 물살을 거슬러 오르려고 하는 피라미처럼 애처롭기만 했다. 그런 요동 끝에 우랄산맥을 넘어가자, 비행기는 시속 901㎞를 넘고, 널브러진 푸른 초원과 함께 지상의 도로가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풍경도 바뀌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훨씬 북쪽으로 날아간 여객기는 리도 호수를 통과하면서 상테스부르크 상공을 지나자, 기수를 남쪽으로 90도 바꾸더니 발트해를 직각으로 날았다. 시속 890㎞, 비행고도 1만 1890m, 바깥 기온 -58도다. 로마 도착 35분 전 이탈리아 밀라노 상공을 비행한다고 할 때 시속은 948㎞로 올라가고, 비행고도는 2300m로 뚝 떨어졌다, 바깥 기온도 3도를 가리켰다. 10월 21일 19시 12분, 우리 일행을 태운 여객기는 로마의 레오나르드 다빈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오후 1시 15분에 출발하여 논스톱으로 12시간 26분 동안 날아왔는데도 로마는 그리니치(Greenwich) 표준시로 우리보다 7시간 늦어서 불과 5시간 만에 로마에 도착한 셈이다. 오스트리아·스위스·독일·프랑스 등 서유럽국가는 대부분은 로마와 같은 표준시였고, 테제베(TGV)를 타고 런던으로 건너가니 유럽대륙 국가들보다 1시간 더 늦어졌다. 유럽은 매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 9시부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 9시까지 서머타임제로 서울 표준시보다 1시간 늦다가 10월 마지막 일요일 9시에 다시 1시간을 늦춰서 8시간 차이가 난다.

고대로마 포로로마노
고대로마 포로로마노

로마는 BC 753년 로물루스(Romulus)·레무스(Remus) 쌍둥이 형제가 건국했으며, 로마(Rome)라는 지명도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로물루스 전설은 로마제국이 세워지기 훨씬 전인 BC 4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알바롱가(Alba Longa)의 왕 누미토르의 유일한 혈육은 딸 레아 실비아 하나뿐이었다. 그러자 누미토르의 동생 아물리우스가 형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딸 레아가 장차 왕위를 요구할 아들을 낳지 못하도록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가 될 것을 강요했으나, 레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관계하여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그러자 아물리우스는 갓난아기들을 테베레강에 빠뜨려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아기를 담은 여물통은 강을 따라 흘러가다가 무화과나무 옆에 닿았다. 이곳에서 두 아기는 암늑대 젖을 먹고 자라다가 목동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어 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자기가 구조된 곳에 도시를 세웠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로마다.

로물루스는 성벽을 쌓아 외적을 막았는데, 레무스조차 성벽을 뛰어넘다가 로물루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굳건한 성벽을 무기로 로물루스는 도망자와 추방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인구를 크게 늘렸고, 또 이웃의 사비니(Sabini) 여인들을 납치하여 결혼하여 인구를 늘였다. BC 509년 에투리아인 왕이 쫓겨난 후 공화국이 된 로마는 지중해를 통하여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4세기경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더니, BC 146년 포에니 전쟁에서 해군력을 자랑하던 카르타고를,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물리치고 BC 27년 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가 즉위할 무렵에는 동쪽으로 시리아, 서쪽으로 스페인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이룩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의 우월성과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작가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에게 로물루스 전설보다 더욱 웅장하고 오래된 로마 건국 신화 창조를 명령했다. 결국 베르길리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에 패한 장수 중 아이네이아스(Aineias)를 찾아서 로마인의 조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망한 트로이의 후예가 그리스에 복수한다는 것은 곧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명분이 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와 인간 안키세스(Anchises)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꾸미고, 또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Hector)에 버금가는 용맹한 장수로 그렸다. 트로이의 멸망 후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장애인 아버지와 자식, 그리고 유민들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로마의 티베르강가에 닻을 내렸다.

당시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라티누스 왕은 라비니아 (Lavinia)라고 하는 예쁜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이네아스는 그녀와 결혼하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고대도시 라비니움(Lavinium)을 세웠다. 그의 후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국하여 아이네이아스는 로마 건국의 조상이 되고,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이울루스(Iulus)는 알바롱가를 세우고 로물루스 형제 혈통의 조상으로서 율리우스(Julius) 가문의 선조라고 했다.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는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고, 또 카이사르의 외조카이자 양자인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아이네이아스의 피가 흘러서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사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 신화 ‘아이네이아스’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면서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황당한 창작 소설을 파기하라고 유언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대로 출판하도록 했다. 또,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모든 신들을 로마의 신으로 바꿨으니, 로마의 역사 창조는 얼마나 허구였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찬란한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3세기에 이르러 부패로 쇠퇴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부흥을 꾀했고, 또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가톨릭을 공인함으로써 부흥을 모색했다.

가톨릭의 국교화 이후 교황이 신권과 속권을 함께 가진 로마와 중세 유럽은 신이 지배하는 신국(神國)이었으니, 삼국시대 이래 고려까지 불교가 국교로서 모든 문화와 예술, 정치를 지배해 왔던 우리네 역사보다 더한 것이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로 삼았지만, 서로마는 프랑크족과 반달족에게 시달리다가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그 후 1,000년을 더 버티던 동로마도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망하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산천을 경계 삼아 구역을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했지만, 오늘날의 태양력인 율리우스력을 제정한 로마교황 그레고리 13세(1502~1585)가 바티칸박물관의 지도실(地圖室)에 길이 120m, 폭 6m의 벽면에 프레스코화로 그린 관할도 40장에는 십자가 한 개 표시(✟)는 주교가 관리하는 도시이고, 십자가 두 개 표시(☨)는 대주교가 관리하는 두오모 성당, 십자가 세 개가 표시된 곳은 세계에서 유일한 성 베드로 성당을 나타내는 부호로 표시하고 있다. 450년 전에 그린 지도가 지금의 지도와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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